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 처용희(處容戲), 처용지희(處容之戱)
조선시대 향악정재로, 다섯 명의 무원이 처용 복장과 가면을 착용하고, 동‧남‧서‧북‧중앙의 오방위에서 무용수 간의 오행 관계를 표현하며 추는 춤.
처용무는 다섯 명의 무용수가 처용 가면을 쓰고, 오색(청ㆍ적ㆍ황ㆍ흑ㆍ백색)의 복식을 착용하고, 동ㆍ남ㆍ서ㆍ북ㆍ중앙의 오방위(五方位)나 원(圓)을 구성하는 등 대형을 변화시키면서 추는 춤이다. 이로써 오방처용무라고 한다. 처용무를 추는 목적은 나쁜 재앙을 막아서 물리치고, 장차 경사(복)를 맞이하려는 벽사진경(辟邪進慶)에 핵심이 있다. 조선시대 처용무는 연말 나례(儺禮) 때에 역신(疫神; 전염병을 옮기는 신)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추었으며, 궁중이나 지방관아의 잔치 때에도 잔치가 끝날 무렵 처용무를 추었다. 춤의 대형변화를 통해 우주의 질서와 조화의 오행(五行) 사상을 외형적 상징으로 표현한다.
처용무는 신라 말 헌강왕(憲康王) 때의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랑망해사」 조에 처용과 관련한 사건들이 설명되어 있다. 처용은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한 명인 신인(神人)인데, 처용의 아름다운 부인을 탐냈던 역신이 이를 알고도 춤춘 처용의 모습을 보았고, 처용의 어진 덕(德)에 감격하여 용서를 빌면서,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둔 곳에는 절대 침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처럼 처용이 추었던 춤과 벽사진경의 기능이 처용무의 유래라 하겠다. 고려시대에는 ‘처용희(處容戱)’라 불리며 연향에서 연행되었고, 고려사 에 송경인(宋景仁)이 1236년(고종23) 곡연(曲宴)에서 처용희를 추었다는 기록이 처음 보인다.
오방처용무가 시작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1525) 「처용지희(處容之戱)」를 근거로 조선 초기부터 유래한다는 주장이 있다. 용재총화에는 “처음에는 한 사람이 검정색 베옷[흑포(黑布)]을 입고 사모(紗帽)를 머리에 쓰고 춤추었는데, 그 뒤에 오방처용이 있게 되었다(初使一人黑布紗帽而舞, 其後有五方處容.)”고 하였다. 이 글에서 ‘처음[初]’이라고 한 것과 ‘그 뒤[其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종(世宗)이 그 곡절(曲折)을 고쳐서 <봉황음>이라 이름하고, 국가[廟庭]의 정악(正樂)으로 삼았다. 세조(世祖)는 그 제도를 확대하여 크게 합악[大合樂]으로써 그것을 연주했다(世宗以其曲折, 改撰歌詞, 名曰鳳凰吟, 遂爲廟廷正樂. 世祖遂增其制, 大合樂而奏之.)”고 한 문장을 근거로 조선 초기부터 오방처용무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 개요 처용무의 목적은 우선 벽사진경에 있으며, 조선시대 궁중무로서의 처용무는 오행사상이 추가되었다. 다섯 명의 무용수가 오색(청ㆍ적ㆍ황ㆍ흑ㆍ백색)의 복식을 입고, 붉은색 처용 얼굴 가면을 착용하고 춤추었다. 다섯 명의 처용은 각각 오색 의상의 색깔에 따라 오방에 배치하거나 일렬 대형, 원형을 만들고 변화하면서 춤을 전개하는데, 처용무의 이러한 대형 변화와 무용수 간의 원소 관계는 목(木: 청색‧봄‧동쪽‧백성[民]), 화(火: 적색‧여름‧남쪽‧일[事]), 토(土: 황색‧사계‧중앙‧군주[君]), 금(金: 흰색‧가을‧서쪽‧신하[臣]), 수(水: 흑색‧겨울‧북쪽‧)로 상징되는 오행(五行)의 원소 간 질서와 순환을 춤의 형태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다섯 가지 원소들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의 상징 관계를 드러내고 표시하는 춤 행위가 곧 처용무의 내용이다. 춤의 흐름은 대체로 느리지만 순조롭고, 오방의 원소인 각 처용은 색을 기초한 본분과 그 관계의 조화를 표상함으로써 우주 자연의 주기적 순환을 표방한다. 이를 통해 나쁜 질병이나 삿된 일들을 과거의 일로 떠나보내고, 새해 새날의 경사를 맞이하는 나례의 염원을 춤으로 실행한 것이다. ○ 절차와 구성 처용무의 전 과정은 25분~30분 정도 소요된다. 악학궤범 처용무의 진행은 전도(前度)를 기준으로, 입장(入場) → 일렬작대(一列作隊) → 오방작대(五方作隊) → 일렬작대 → 변무(變舞) → 환장무(懽場舞)로써 퇴장하는 형식이다. 『악학궤범』의 처용무 전도란 첫 번째 추는 처용무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음력 12월 나례의 구나(驅儺) 의식을 마친 후, 이어서 창경궁에서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을 연행했던 무보가 실려있다. 이때 전도와 후도로 나뉜 처용무를 두 번 춤추었는데, 그 첫 번의 처용무를 말한다. 하지만 보통의 공연에서는 10분 내외로 편성된 짧은 처용무로 공연한다. 짧은 버전의 처용무를 연행할 때는 아래의 ‘입무’ 과정을 생략하고, 춤의 진행과정에서 동작의 반복을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연행 소요 시간을 줄인 것이다. 처용무보(처용무보존회, 2008)를 참고하여 처용무 음악에 따른 전 과정의 춤 대형의 진행 절차와 주요 동작 구성을 표로 제시한다. 1971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처용무는 입장 → 일렬작대 → 사방작대(四(隅)方作隊) → 우선회무(右旋回舞) → 일렬작대 → 오방작대 → 좌선회무(左旋回舞) → 일렬작대 → 퇴장(퇴무)의 순서로 진행한다. ○ 창사 『악학궤범』에 전하는 처용무 창사는 「처용가(봉황음)」 3기와 「삼진작(三眞勺)」, 「정읍(井邑)」 급기, 「북전(北殿)」 급기의 순서로 노래 불렀다. 하지만 조선 후기 궁중 연향에서는 이들 노래를 연행하지 않았다. 현재는 보통 「처용가」의 첫 구절인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를 가곡 〈언락(言樂)〉 가락에 얹어 노래하고,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는 〈편락(編樂)〉으로 짧게 노래하고 있다. [창사](언락) 『악학궤범』권5 <학연화대처용무합설> 중 <처용가 만기>의 일부(전강~부엽까지)를 처용무를 연행할 때 언락 가락에 얹어 노래한 것이다. 전강(前腔) 신라성대(新羅盛代) 소성대(昭盛大) 천하태평(天下太平) 라후덕(羅候德) 처용(處容) 아바 이시인생(以是人生)애 상불어(相不語)시란 이시인생(以是人生)애 상불어(相不語)시란 부엽(附葉)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일시소멸(一時消滅) 샷다. [해석] 신라 성대(盛代) 밝은 성대 천하태평 나후덕(羅候德) 처용아비여! 이 인생(以是人生)에 대해 서로 말하지 말라 하셨는데 이 인생(以是人生)에 대해 서로 말하지 말라 하셨는데 삼재(三災)와 팔난(八難)이 일시에 소멸하셨다. 우편/편락 이 노래는 『악학궤범』 처용가 중 <봉황음 급기>의 전강 부분이다. <봉황음 급기> 전체 중 앞 일부이다. 전강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 가기(佳氣) 울총총(鬱葱葱) 샷다 금전구중(金殿九重)에 명일월(明日月) ᄒᆞ시니 군신천재(君臣千載)예 회운룡(會雲龍)이샷다 희희서속(熙熙庶俗) 춘대상(春臺上)이어늘 제제군생(濟濟群生) 수역중(壽域中)이샷다 [해석] 산하 천리국에 아름다운 기운이 울창하시도다. 금전구중에(깊은 궁궐 안에) 일월 같이 밝은 덕을 밝히시니 임금과 신하가 천년에 구름과 용처럼 모였다. 화평한 백성의 풍속은 춘대(春臺)에 있거늘 많고 많은 뭇 백성은 잘 다스려진 영역 안에 있도다.
- 원문 출처: 악학궤범 권5. 12b6~7. 14a4~5.
○ 춤사위 처용무는 일렬, 오방, 원형 등 대열과 변화를 통해 춤이 진행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대형 변화의 연행적 특징은 오행의 운행 관계에서 일정한 사상적 의미를 표현한다. 『악학궤범』권1의 「오성도설(五聲圖說)」에 의하면, 중앙의 토성(土聲)은 임금[君]의 상(象)이고, 궁성(宮聲)이며 사방에 통달하는 특성이 있다고 했다. 즉 중앙(황)은 동‧남‧서‧북에 통달하는 4처(청‧적‧흑‧백처용)의 벼리가 된다. 남쪽의 화(火)는 치성(徵聲)으로 ‘사(事)의 상’이고, 서쪽의 금(金)은 상성(商聲)이며 ‘신하[臣]의 상’이다. 북쪽의 수(水)는 우성(羽聲)으로 ‘물(物)의 상’이다. 동쪽의 목(木)은 각성(角聲)이며 ‘백성[民]의 상’이다. 이 같은 궁‧상‧각‧치‧우 오성의 운행은 처용의 오색이 표현하는 오방(五方)‧오기(五氣)‧오성(五性)‧오미(五味) 등 자연 운행의 오행을 나타낸다. 다섯 명의 처용이 착용한 복식과 그들의 무대 위 자리 배치는 오행의 운행을 기초한 5원소 간의 관계를 표상한다. ① 처용무 일렬작대무(一列作隊舞)의 연행 특징 처용무의 일렬작대무는 처용 다섯 명이 등장하여 청‧적‧황‧흑‧백처용의 순서로 횡렬을 이루고 나란히 늘어서서 추는 춤이다. 일렬작대무는 다른 대형으로 변하는 사이사이에 배치된 중요 과정이다. 이들 5처의 관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과정은 <향당교주> 음악이 연주될 때의 상대상배(서로 마주보고 서로에게 절함) 동작군(動作群)이다. 일반적인 오행의 상생 관계는 목(나무, 청)이 화(불, 적)를 생하고, 화는 토(흙, 황)를 생하며, 토는 금(쇠, 백)을 생하고, 금은 수(물, 흑)를 생성하는 원리다. 그런데 처용 5인의 무대 배치는 청‧적‧황‧흑‧백의 순서로 선 모습이다. 이 때문에 흑처용과 백처용의 상생 위치의 뒤바뀜으로 인해 옳고 그름의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처용의 이 같은 자리 배치는 악학궤범에 제시된 것이다. 이 책의 「오성도설」로써 임금(군)이 벼리로서 중심된 4처와의 관계임이 밝혀졌다. 즉 가장 바깥에 위치한 청색(백성)과 백색(신하)은 중앙의 황색(임금)을 조력하는 존재로서, 그 들 사이에 적색(일, 事)과 흑색(물, 物)이 능만을 피하는 위치에 놓인 것이다. 이는 “임금‧신하‧백성은 서로 능만[陵]해서는 안되고, 사와 물은 꼭 능만을 피하라는 것은 아니다”(『악학궤범』 권1. 4b2)라고 명시한 악론(樂論)에 의해 위치 지워진 관계였다. 즉 청(목)‧적(화)‧황(토)‧흑(수)‧백(금)의 일렬작대무 배열은 사람 간에 임금(군)을 능만하지 않고, 오히려 사건과 재물을 통해 임금의 사업을 돕는 관계인 것이다. 처용무 보유자인 김용은 청→ ←적, ←황, 흑→ ←백의 관계를 처용 5인이 서로의 오덕(五德)을 찬미하는 모습이라고 해석하였다. 반대 방향으로 돌아 인사하는 것은 음과 양의 균형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임금에 의해 다스려지는 유교적 사회질서를 상징한 것이다.
② 오방작대무(五方作隊舞)의 연행 특징 처용무의 핵심 구성은 오방작대무(五方作隊舞)이다. 중앙에 황색(대지)이 중심되어 동쪽에 청처용, 남쪽에 적처용, 서쪽에 백처용, 북쪽에 흑처용이 자리하여 오방위를 이룬다. 황색이 중심에서 북‧동‧남‧서방에 위치한 4처용을 전체 아우르는 벼리의 모습이다. 개별적으로는 황처용이 흑처용과 만나고 헤어지며, 또 황처용과 청처용이, 황처용과 적처용이, 황처용과 백처용이 차례로 만났다가 헤어지며 돌아가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것은 사계의 자연 만물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끊임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모방하는 한편, 국가의 풍농(豐農)을 위한 춘하추동의 일기(日氣) 순환을 표현한 춤 구성이다. 일렬작대무에서는 상생과 상극이 황색처용을 중심으로 좌우에 나란하여 공존했던 것이라면, 오방작대무는 오행의 우주 자연적 질서와 순환을 표상한 것이다.
③ 우선회무와 좌선회무의 원형 춤의 특징 현행 처용무에는 두 가지 방식의 회무를 연행하고 있다. 첫째는 우선회무인데, 중앙에 있는 황처용을 중심으로 청‧적‧흑‧백의 4인 처용이 시침의 역방향으로 도는 공간 형태이다. 두 번째 좌선회무는 오방 대형에서 중앙의 황처용이 적처용과 백처용 사이로 물러가서 하나의 원형을 완성하고, 시침의 순방향으로 도는 모습이다. 즉 처용무의 진행과정에서 사우방의 춤을 추고 난 다음에는 황처용 중심의 동심원[◉]을 이루어서 우선회무를 행한다. 우선회무를 마치면 일렬작대로 돌아갔다가 오방위의 공간을 형성하여 오방작대무를 연행한다. 이것이 끝나면 일원[○]이 되어 좌선회무를 연행하게 된다. 처용무 보유자 김용은 사우방과 우선회무, 그리고 사정방과 좌선회무의 관계를 음극(陰極)과 양극(陽極)의 양극상(兩極象)이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즉 음양 간의 조화로운 관계가 변화롭게 표상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 반주 음악 처용무의 음악은 <수제천>, <향당교주>, <세령산>, <삼현도드리>, <웃도드리>로 반주되고 있다. 처용가의 ‘신라성대 소성대’를 노래할 때는 <언락>에, ‘산하천리국에’를 노래할 때는 <편락> 가락에 노랫말을 얹어 노래하고 있다. 전과정은 25분~30분이 소요된다. 『악학궤범』 처용무의 음악과 노래는 <처용[봉황음(鳳凰吟)] 만기(慢機)>, <봉황음 중기(中機)>, <봉황음 급기(急機)>, <삼진작(三眞勺)>, <정읍 급기>, <북전(北殿) 급기>의 순서로 연주했다. 각 음악에는 고유의 가사가 있으므로 악공들은 음악연주를 담당하고, 제기(諸妓: 16명의 기녀)는 악공들 앞에 두 줄로 자리하여 각 음악에 맞추어 <봉황음 만기>부터 <북전급기>까지 노래하였다. <봉황음 만기>와 <봉황음 중기>는 고려로부터 전승된 <처용가> 1절과 2절인데, 1절(만기)의 가사는 처용의 길상(吉相)한 외모 전신(全身)을 묘사했다. 2절은 처용의 권위와 능력을 통해 그에 쫓기는 미약한 역신과의 관계를 노래했다. <봉황음 급기>는 <처용가>의 내용과 완전히 달라진 특징이 있는데, 바로 세종이 개찬한 것으로써 조선 조정의 군신 화합과 수명장수, 자손만대의 태평성대를 염원한 내용이다. 다음 <삼진작>은 고려 의종(毅宗) 때 과정(瓜亭) 정서(鄭敍, ?~?)가 지은 가요이다. 정서가 유배지에서 임금인 의종이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임금을 향해 그리움의 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삼진작>은 <진작>을 연주하는 빠르기에 따라서 일(一), 이(二), 삼(三)으로 구분하여 3번을 반복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음 <정읍 급기>는 <정읍사(井邑詞)>를 노래했는데,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행상 떠난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마지막 <북전 급기>는 조선 성종(成宗) 21년(1490)에 고친 가사를 악학궤범 <처용무>에 기재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북전은 음란한 내용이어서 이때 고쳐 바로잡아서 처용무의 마지막 악곡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 내용은 <봉황음 급기>와 유사하며, 국왕의 어진 덕으로 잘 다스려진 조선의 정치로 인해 중국 전설의 요순(堯舜) 임금 때처럼 세상의 일기와 음양 운행이 순일하며 태평성대를 이루니, 백성들이 임금의 성수무강을 천년만년 누리기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처용무의 반주악기는 『악학궤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조에 따르면 33인의 악공이 좌방 향악대와 우방 당악대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창경궁 관처용의 경우 제시된 악공의 수는 12인이다. 따라서 처용무를 위한 악대 편성은 향악기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행 처용무의 음악은 이왕직아악부의 전통을 따라 대풍류의 삼현육각 편성인 장고 1인, 좌고 1인, 대금 1인, 피리 2인, 해금 1인이 악사의 박(拍)을 신호로 춤의 절주를 맞추고 있다. ○ 복식ㆍ의물ㆍ무구 현행 처용 가면과 복식은 처용무보존회가 2005년경 악학궤범권9의 「처용관복」조를 근거로 새로 제작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에서 제작했던 처용 복식과 가면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이후 국립국악원에서 몇 차례 제작했던 처용무 복식은 외부 소장자의 기증으로 처용복 상의 4점이 국립국악원 소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 외 기존 보유한 처용탈이 1점 있다. 물론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처용무 의상을 별도로 갖추고 있다. 따라서 처용무 의상과 가면까지의 일습은 악학궤범을 참고로 설명할 수 있다. 처용무의 웃옷[의(依)]은 청ㆍ적ㆍ황ㆍ흑ㆍ백색이고, 안에는 소매 길이가 긴 흰색 저고리[한삼(汗衫)]를 입는다. 바지[말군(襪裙)]는 청ㆍ적ㆍ흑색의 세 가지로 웃옷과 배색이 되도록 짝이 지어졌다. 바지 위에는 황초상(黃綃裳)을 입고, 오방처용의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드리운다. 조선시대에는 길경(吉慶)으로 허리를 묶고 장식으로 늘어뜨렸으나, 현재는 착용하지 않는다. 상의 겨드랑이 아래에 홍정대(紅鞓帶)를 꿰는 고리를 만들어서 허리띠를 착용한다. 사모(紗帽) 위에는 모란꽃, 복숭아 열매, 복숭아 나뭇가지를 장식하고, 가면의 양쪽 귀에는 크고 둥근 귀고리를 달았다. 처용무의 가면은 <처용가 만기>에 묘사되었다. 머리에 꽃을 가득 꽂아 무거워 보이고, 이마는 아주 넓으며, 눈썹은 산처럼 기울어져 있다. 눈은 애인을 서로 만난 사람처럼 웃음을 띠고 있고, 귀는 음악을 즐기는 듯하며, 얼굴색은 홍도화(紅桃花)처럼 붉은색이다. 코는 오향(五香)을 맡을 수 있도록 크고, 입은 앵도를 머금고 있는 듯 붉다. 이빨은 백옥 유리처럼 하얗고 사람들이 칭찬하듯 많은 복을 가진 밀려 나온 턱이다. <처용가 만기> 가사의 3/4 정도가 처용의 외모를 묘사한 내용이다. ○ 역사적 변천 및 전승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 설화에 기원을 둔 춤으로, 역귀(疫鬼)를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벽사적 성격을 지닌다. 고려와 조선 문인들 역시 이를 신라에서 비롯된 전통으로 인식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처용희(處容戱)’라 불리며 연향에서 연행되었고, 처용무는 조선 전기에 궁중 정재로서의 위상이 정립되었다. 『악학궤범』에는 처용무의 상세 악보가 있어서 춤의 전체적 구성과 절차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세조가 대합악을 명하여 학무(鶴舞)와 연화대무(蓮花臺舞)가 처용무(處容舞)와 합쳐져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 추어지기도 했다. 대합악으로 연주하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매년 제야(除夜: 음력 12월 말일) 때 창경궁에서 관처용 행사로 기녀 16인이 노래를 담당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창덕궁 관처용은 가동(歌童) 6인이 노래하는 가운데 오방처용무만 연행했다. 이는 매년 제야 때마다 구나(驅儺)의 벽사(闢邪)를 목적으로 연행한 정기 세시(歲時) 행사가 되었다. 조선 후기인 숙종(肅宗) 31(1705)년에 편찬된 국립국악원 소장 『악학궤범홀기(樂學軌範笏記)』 처용무의 춤 과정은 『악학궤범』 전도 처용무와 거의 유사하다. 그런데 음악은 <처용 만기>나 <처용 중기>가 아닌 <영산(靈山)>을 연주하였다. 또 음악 이름이 따로 제시되지 않은 채 ‘악은 점차 빠르게(樂漸數)’가 표시되어 있어서, 앞에 제시된 <영산(회상)>을 점차 빠르게 연주하라는 지시라고 볼 수 있다. 처용무 반주음악으로 <영산회상>을 점차 빠른(속도)로 연주하라는 지시임을 알 수 있다. 숙종조 이래 처용무는 진연의 파연무(罷宴舞: 잔치를 마칠 때의 춤)로 기능했다. 또 영조(英祖)는 “나라에서 진연할 때 처용무를 사용하는 뜻은 진정 우연이 아니고 그 안에 경계의 뜻이 담겨 있다.”(上曰, 國家進宴時, 用處容舞之意, 不甚偶然, 警戒之意, 寓於其間.”)고 하였다.
철종(哲宗) 8년(1857) 『통명전진찬시 의주‧창사‧회무도(通明殿進饌時儀註唱詞回舞圖)』의 처용무 음악은 <정읍만기>로 시작하여 <향당교주>, <영여민락=여민락령>, <미후사>, <향당교주>의 차례로 연주했다. 여기에서 <향당교주>는 영조 42년(1766)에 <영산회상>을 대체한 이름이다. <영산회상>은 불가(佛家)의 말이므로 <향당교주>라고 부르도록 했다. 철종 8년의 진찬 이후, 고종(高宗) 때에는 궁중 연향에서 춤춘 기록이 없다. 다만 『고종실록』 42권(1902년(고종 39) 5월 27일)에 70~80세 노인 신하들을 위로하고 대우하는 기로소(耆老所) 잔치를 베풀 때, 고종이 전례에 따라 처용무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기록이 전할 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아악부의 악사 이수경(李壽卿)이 재현하여 가르쳤고, 1923년 순종(純宗) 탄신 경축공연과 1930年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 부부를 위한 만찬연 등에서 공연되었다. 1931年 창덕궁 인정전에서 촬영된 「조선무악」 영상이 현존한다.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에서 이왕직아악부 출신 원로 사범들에 의해 처용무가 연행되고 전수‧지도되었다. 현재 (사)국가무형문화유산 처용무보존회와 국립국악원 무용단을 중심으로 전승과 공연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처용무는 후기 신라로부터 현재까지 1100여 년을 이어 온 유구한 전통춤이다. 처용 가면과 복식을 통해 벽사진경과 예악론의 음양오행을 춤으로써 구현하는 희귀한 국가무형유산이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배경에도 처용무의 사상적 특수성이 피력되었다. 한국전통춤 중에서도 오랜 역사와 함께 문학적 정서적‧정신적 소산으로서 높은 가치를 살필 수 있다.
국가무형문화재(1971),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09)
『고려사』 『삼국유사』 『승정원일기』 『악학궤범』 『악학궤범홀기』
김용,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처용무 김용』, 국립무형유산원, 2018. 이종숙, 「『악학궤범』 처용무 작대(作隊)의 의미 조명」, 『한국사상사학』 36, 2010. 이종숙, 「조선후기 궁중 연회용 처용무 변화에 대한 연구」, 『무용역사기록학』 55, 2019. 이흥구 글, 이상윤 사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국가유산청, 2000. 처용무보존회 편, 『처용무보』,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보존회, 2008.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