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지속된 판소리와 민속악 중심의 공연.
초기에는 축음기 회사들이 음반을 홍보하기 위해 명창들의 연주회 형식으로 개최했으나, 대중적 호응을 얻으며 점차 경연대회 성격을 더해갔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고, 단순히 판소리만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민속음악과 선비풍류, 춤, 기악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는 종합 예술 무대로 확장되었다. 또한 권번 기생들의 참여와 함께 대중 투표 방식과 같은 새로운 경연 방식이 도입되어 인기를 더했다.
1920년대 들어 축음기 보급이 확대되고 음반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새로운 공연 양식이 기획되었다. 축음기회사가 주최한 음반 홍보을 위한 연주회가 큰 호응을 얻자 1926년에 명창들이 주축이 되어 광무대에서 '명창대회'라는 명칭으로 공연을 개최했다.
공연 주최 및 개최 양상
명창대회의 주최, 개최 시기, 장소는 행사 계기에 따라 달랐다. 초기에는 콜롬비아, 빅터, 오케와 같은 음반회사와 경성방송국이 음반 홍보를 목적으로 대회를 열었다. 특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같은 언론사들은 독자들을 위한 행사나 자선 목적으로 대회를 주도하며 그 영향력을 키웠다. 1930년대에는 조선음률협회나 조선성악연구회 같은 민속음악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원산, 당진, 하동, 대구, 경주, 포항, 전주, 순천 등 전국 각지로 공연 범위를 넓혔다.
공연구성과 내용
명창대회는 초기 판소리 명창이 중심이었지만, 점차 민요, 정악, 가곡, 심지어 서양음악까지 포함하는 종합 예술 공연으로 발전했다. 근대적 극장과 조명을 활용한 무대는 기악 연주로 시작해 판소리 명창들의 기량 자랑으로 이어졌고, 공연 중간에는 권번 기생들이 경서도 잡가, 전통춤, 유행가 등을 선보이며 다채로움을 더했다. 명창대회는 단순히 듣는 연주회 형식을 넘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경연 방식을 도입했다. 관객들은 추임새나 환호 외에도 출연자에게 돈을 던지거나 꽃다발을 선물하며 인기를 표현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관객 투표'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 입상자에게는 상금이나 음반 취입 기회가 주어져 명창들 간의 경쟁을 유도하기도 했다.
역사와 변천
명창대회는 1926년 11월 경성 광무대에서 첫 공연을 시작했다. 이후 1927년부터는 신문사, 경성방송국, 지방 단체 등 다양한 주체가 대회를 기획하면서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전성기 (1920년대 후반 ~ 1930년대)
이 시기는 명창대회의 전성기였다. 판소리 명창들 외에 여성 명창과 기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조선음률협회와 조선성악연구회 같은 민속음악 단체들이 공연을 주도하여 다양한 형식의 대회를 선보였다. 특히 **'전조선명창대회'**처럼 대규모 공연은 민속음악 공연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쇠퇴와 소멸 (1940년대 ~ 1960년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가 전시 체제를 구축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하는 등 공연 활동의 후원 기반을 통제하자 명창대회는 급격히 쇠퇴했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국악원의 전신인 국악원을 중심으로 공연이 재개되고 신문이 복간되면서 일정 부분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전국민속예술대회와 국악대제전 같은 새로운 형태의 국악 공연이 등장하면서 점차 자리를 잃었고, 1960년대 초까지 간헐적으로 개최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명창대회는 단순히 판소리 공연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는 축음기를 통해 전통 예술을 대중화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했으며, 극장이라는 근대적 공간에서 열리는 새로운 공연 양식을 확립하는 예술적 의의를 가졌다. 또한, 명창들이 대중적 스타로 자리 잡고 민족의 한을 풀어주는 정서적 위안을 제공함으로써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사회적 가치를 지닌 행사였다
김민수, 「초기 명창대회에 관한 일고찰-1920년대 중·후반을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59, 2016. 김민수, 「1930년대 민속악의 공연양상-명창대회를 중심으로」, 동양음악 41, 2017.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부크크, 2025.
김민수(金珉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