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에 설립되어 판소리 명창과 산조 명인을 비롯한 민속악계 국악인을 중심으로 활동한 국악 단체.
대한국악원은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함화진·박헌봉·유기룡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민속악계 중심의 국악 단체로, 초기에는 ‘국악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창극 전담 기구인 ‘국극사’를 산하에 두고 활동하였다. 창극 공연과 전국 농악 경연 대회, 사회 참여 공연, 국악 강습회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국악의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장하였으며, 특히 민속 음악을 종합 예술로 부각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50년대 한국 전쟁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 주요 인사들의 월북과 검거로 활동이 위축되었고, 1952년부터는 국립국악원과의 명칭 혼동을 피하기 위해 ‘대한국악원’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여성국극단 중심의 연합체로 재편되어 공연 기반을 넓히고, 국악 보급과 교육에도 힘썼다. 1961년 한국국악협회로 통합되며 해산하였으나, 구성원들은 이후 국악 교육과 전승에 핵심적으로 참여하며 한국 민속악의 지속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가 조직되어 판소리, 창극, 가야금 병창 등의 공연과 음반 활동을 펼친 민속악계 명창·명인들이 활동하였다. 이후 1939년에는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사장이었던 함화진이 사직하고 나와, 이왕직아악부 출신 일부 음악가들과 함께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에 ‘조선음악건설본부 국악위원회’를 급히 구성하였다. 이 조직은 곧 ‘국악건설본부’로 개칭되었고, 같은 해 8월 29일에는 조선음악건설본부에서 독립하여 ‘국악회(國樂會)’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국악회는 점차 규모와 체제를 갖추어 1945년 10월 10일 ‘국악원(國樂院)’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1949년, 이왕직아악부의 후신인 ‘구왕궁아악부’의 국가 운영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전쟁 중이던 1951년 정부 조직으로서 ‘국립국악원’이 개원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민간 국악원은 명칭 혼동을 피하기 위해 1952년부터 ‘대한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 설립목적 및 시기
대한국악원은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10일, 조선 국악의 독자적 원리를 규명하고 이를 체계화하여 국악의 진지한 연구와 발전을 도모하고자 설립되었다. 창립 당시에는 ‘국악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국악학교 설립, 국악극장 건립, 문헌·악기 수집, 국악 잡지 발간 등 구체적인 활동 방향을 설정하고 민중에게 전통 음악을 개방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본부는 서울 중구 다옥정 92번지에 위치했으며,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며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199의 17로 이전하였다. 1951년 국립국악원이 정부 조직으로 개원되자 명칭 혼동을 피하기 위해 1952년부터 ‘대한국악원’으로 개명하여 활동을 이어갔으며, 1961년 한국국악협회로 통합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 설립 주체 및 단체 구성
대한국악원의 운영 주체는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함화진과 민속악 연구가 박헌봉, 유기룡 등 국악계의 행정가 및 이론가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실질적인 구성은 판소리·창극·산조·가야금 병창 등 민속악 분야의 명창·명인들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이왕직아악부 출신 인사들도 참여했으나, 산하에 창극 전담 기구인 ‘국극사’를 두고 창극 중심의 활동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창악인이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여성국악동호회, 여성국극단 등 다양한 산하 단체가 결성되며 구성의 폭이 넓어졌고, 1950년대에는 주요 음악인들의 월북과 조직 개편을 거치며 구성원 변화가 나타났다.
대한국악원은 설립 초기 총무국·문화국·사업국의 3개 국과 12개 부서로 구성되어 국악의 이론 정립과 공연 활동을 병행하였다. 각 부서는 아악·정악·창악·민요·무용 등 국악 전반을 포괄하며, 실무 조직으로는 국악학교기성회, 국립극장설치위원회, 기관지 발간 준비위원회, 문헌악기 수집위원회 등을 두어 국악 진흥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1947년에는 공연국과 문예국, 기획국이 추가되며 4개 국, 9개 부로 개편되었고, 산하에는 국극사 외에도 여성국악동호회, 여성국극동지사, 민요단체 등 다양한 실연 중심 단체들이 결성되어 활동의 폭을 넓혔다.
○ 활동 내용
대한국악원은 창립 이후 국악의 예술적 위상을 높이고 민속 음악의 대중화를 실현하기 위해 공연, 경연, 교육, 사회참여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 창극 공연 활동
대한국악원은 창립 초기부터 창극 공연을 핵심 활동으로 삼았으며, 직속 창극 단체인 ‘국극사’를 중심으로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 고전 창극을 무대에 올렸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는 서울뿐 아니라 대구·부산 등지에서도 활발한 지방 공연을 펼쳤고, 《아랑애화》, 《장화홍련전》, 《선화공주》, 《고구려의 혼》 등 창작 창극도 시도하며 창극의 예술적 확장을 꾀했다.
2. 농악 경연 대회 개최
1946년부터 3회에 걸쳐 ‘전국 농악 경연 대회’를 주최하여 지역 농악의 활성화와 민속 예술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각 도 대표팀이 참가한 대규모 행사로, 국악·무용·문학·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심사 위원이 참여하며 농악을 종합예술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3. 사회 참여 공연
해방 공간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공연에도 적극 참여하여, 3·1운동 기념 야외 음악회, 6·10 만세운동 행사, 수해 구제 연예 대회, 8·15 광복 기념 명창 대회 등에서 국악 공연을 통해 사회적 연대와 예술적 실천을 병행하였다.
4. 산하 단체 운영 및 교육 활동
국극사 외에도 여성국악동호회, 여성국극동지사, 민요단체 등 다양한 산하 단체를 운영하며 공연 활동을 다변화하였다. 국악 강습회와 국악학교 설립 준비를 통해 국악 교육 기반을 마련하고, 후속 세대 양성에도 힘썼다.

1947년 8월 민족 좌파를 비합법화하여 좌익계 인사가 대량으로 검거되면서 국악원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검거되었다. 이때 위원장 함화진이 피검되었고 간부들이 바뀌고 활동이 위축되었다. 1950년 1월 구황궁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자 국악원도 대한국악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 대한국악원으로 변경한 시기는 뚜렷하지 않고 다만 신문 기사에서 1952년에 처음 보인다. 전쟁이 끝난 후 대한국악원은 각종 국극 단체의 연합체로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삼성, 낭랑, 화랑, 낭자, 여협, 새한, 진경, 동명, 새봄 등의 여성국극단이 모두 대한국악원 산하 단체였다. 이외에도 대한국악원은 국악 강습회를 개최하며 국악 발전과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나 1961년 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 산하 한국국악협회로 통합되었다.
○ 역사적 변천
1945년 ‘국악원’으로 출범한 이 단체는 1950년 국립국악원이 정부 조직으로 개원하면서 명칭 혼동을 피하기 위해 1952년부터 ‘대한국악원’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한국전쟁과 정치적 탄압으로 주요 인사들이 검거되거나 월북하면서 활동이 위축되었고, 전쟁 이후에는 여성국극단을 중심으로 한 국극 단체들의 연합체로 재편되었다. 삼성, 낭랑, 화랑, 낭자, 여협, 새한 등 다수의 여성국극단이 산하에 속해 활동하였으며, 국악 강습회를 개최하는 등 국악의 보급과 교육에도 힘썼다. 이러한 활동은 1961년 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 산하 한국국악협회로 통합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