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발(響鈸/響撥/響鉢)
조선 초기 향악정재의 하나로, 놋쇠로 만든 작은 바라 모양의 향발을 양손에 매고 부딪쳐 소리를 내며 추는 춤
향발무는 동발[발(鈸)]을 울리며[향(響)] 추는 춤이다. 놋쇠로 만든 작은 바라 모양의 향발을 무용수 양손의 엄지손가락[母指]과 가운데 손가락[長指]에 각각 매어 서로 마주쳐 챙챙 소리를 내며 춤춘다. 세종대부터 왕실의 연향을 비롯하여 사신연과 사연(賜宴; 나라에서 베푸는 잔치)등에서 공연되었으며, 특히 외연에서 무동이 춤추는 주요한 향악정재 종목이었다.
향발무의 유래에 대해서 조선 후기 여러 의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당(唐)나라 궁중 연회악[연악(燕樂)]의 한 종류인 법곡(法曲)에 〈동발상화(銅鈸相和)〉라는 악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이것을 본떠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발무는 조선 전기 세종대에 악(樂)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1449년(세종 31) 10월 3일에 향발 정재는 항상 연습해야하는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성종대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의 시용향악정재(時用鄕樂呈才)에 향발이 수록되었으며, 1505년(연산군 11) 11월 20일에는 연산군이 향발 100쌍을 급히 궁중으로 들이라는 명을 내릴 정도로 인기리에 공연되었다.
조선 후기 숙종대 이후로 군신간의 잔치인 외연에서는 무동이, 왕실 여성과 친인척 잔치인 내연에서는 기녀가 정재를 담당했는데, 무동이 주요하게 추었던 종목에 향발무가 포함되었다. 따라서 외연에서는 무동이, 내연에서는 기녀가 향발무를 추었다.
사신연의 잔치에서도 향발무가 공연되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 권4에 따르면,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여 맞이하는 잔치에서 무동은 붉은 의상을 입고, 보허자악(步虛子樂)에 맞추어 향발무를 춤추었다. 그 모습을 『봉사도(奉使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이후에는 1960년 국립국악원 제48회 국악감상회에서 KBS 여성 국악연수생들이 발표하였다. 1973년 7~8월에는 아동무용연구회에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이 향발무를 안무하여 지도했고, 1980년 6월 16일 국립국악원 ‘전통무용발표회’에서 향발무가 재현 공연 되었다. 이후 무대화된 향발무가 현재까지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
○ 내용
향발무는 놋쇠로 만든 향발을 무용수의 양손 엄지와 장지에 매고 음악의 절차에 따라 향발을 치면서 추는 춤이다.
○ 구성
『악학궤범』권5에 따르면, 도입부에서 무용수는 〈보허자령〉의 반주에 맞추어 〈오양선〉의 파자사를 창사로 부르고, 일렬로 선다. 향발을 치기 전에 두 손을 포개는 공수(拱手)를 하고 무용수끼리 손을 끼는[협수(挾手)] 동작을 한 뒤에 절한다. 진행부에서는 무진도(舞進圖)의 대형으로 향발을 치며 춤추는데, 처음에는 간격을 두고 향발을 치다가 점차 빠르게 향발을 치는 것으로 고조된다. 종결부에서는 다시 처음처럼 일렬 대형으로 서서 향발을 치다가 절하고 물러난다.
○ 구조
향발무의 인원수는 연향에 따라 두 명ㆍ네 명ㆍ여섯 명ㆍ여덟 명ㆍ열 명으로 다양하게 짜여졌다. 『악학궤범』에는 나이 어린 기녀로[年少妓] 한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 주요 춤사위
향발무의 대형은 처음에 일렬로 나란히 서는 ‘초입배열도(初入排列圖)’와 좌무 네 명과 우무 네 명이 서로 마주하는 대형인 ‘무진도(舞進圖)’가 『악학궤범』에 제시되었다. 무진도 대형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하기도 하며 향발을 치며 춤추었다.
향발무의 가장 핵심적인 춤사위는 향발을 치는 동작[擊鈸]이다. 향발을 칠 때에는 세 차례씩 연달아 쳤으며, 먼저 바깥 손의 향발을 치고 안쪽 손의 향발을 치는 순서였다. 향발무의 특징적인 동작으로 팔을 비스듬히 아래로 펴고 무용수들이 서로의 손을 교차하여 끼는[伸臂相挾手] 춤사위가 있다. 『(계사)정재무도홀기』에도 팔을 비스듬히 끼는 ‘신비(伸臂)’ 동작이 있으나, 현대적으로 재구성된 향발무에서는 손을 교차하여 끼는 동작이 생략되기도 한다.
縹緲三山島, 十萬歲方分昏曉. 표묘삼산도, 십만세방분혼효. 春風開遍碧桃花, 爲東君一笑. 춘풍개편벽도화, 위동군일소. 祥颷暫引香塵到, 祝堯齡後天難老. 상표잠인향진도, 축요령후천난로. 瑞烟散碧雲歸, 弄暖一聲長嘯. 서연산벽운귀, 농난일성장소. [창사] 아득할사, 저 삼신산(三神山, 신선이 사는 세 섬), 십만 년 지나서야 밤과 낮이 바뀌었네. 봄바람 천지사방 벽도화(碧挑花) 피웠더니, 동군(東君, 봄을 맡은 동쪽의 신)을 보고서 활짝 웃어 주는구나. 상서로운 회오리바람 잠시 향기로운 먼지[여자들이 걸으면 일어나는 향기, 곧 여자, 여기서는 무희] 끌어오는데 비옵나니, 오래 수를 누리시어 하늘보다 더 오래 사시기를! 상서로운 연기 흩어지고 푸른 구름 돌아갈 때 따스한 날씨 즐기며 길게 휘파람을 불어보네. - 원문 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번역: 강명관
조선 전기 『악학궤범』에서 향발무의 반주음악은 〈보허자령(步虛子令)〉이었다. 향악정재인데도 당악곡이 쓰인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 후기 의궤에서 향발무의 반주음악은 〈보허자령〉ㆍ〈여민락령〉ㆍ〈향당교주〉였으며, 고종대 『정재무도홀기』에서는 〈향당교주〉가 반주음악이었다. 1993년에 편찬된 국립국악원의 『궁중무용무보』에 따르면, 무대화된 향발무는 〈도드리〉와 〈타령〉에 맞추어 춤추었다.
조선 전기 향발무 기녀의 복식은 큰 잔치에서는 붉은 옷[단장(丹粧)]을 입고 여러 장식[잡식(雜飾)]을 했으며, 소규모 잔치에서는 흑장삼에 남저고리를 입었다. 조선 후기『(기축)진찬의궤』(1829) 「공령」에 따르면, 향발무 여령은 화관을 쓰고 초록단의(草綠丹衣)와 황초단삼(黃綃單衫)을 입고, 안에는 남색상(藍色裳), 밖에는 홍초상(紅綃裳)을 덧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鏤繡帶)에 오색한삼을 끼고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또한 향발무 무동은 복두(幞頭)를 쓰고, 남포(藍袍)ㆍ백색바탕에 흑색으로 선을 두른 중단의(中單衣)ㆍ홍야대(紅也帶)ㆍ흑화(黑靴)를 착용했다.
향발무의 향발은 일종의 악기이자 춤 도구이다. 무용수는 향발을 양손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에 끼고 춤을 추었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향발은 놋쇠로 만들며 모양은 동발(銅鈸)과 같지만 크기가 작으며, 향발의 지름은 2치 1푼(약 3.3cm)이다. 향발의 뒤에 사슴 가죽 끈을 달고, 향발 아래에 오색 매듭을 드리운다.
향발무는 청량하게 향발을 울리며 추는 춤으로, 조선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해진다. 중간에 부르는 노래인 창사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장수를 기원하는 〈오양선〉의 ‘파자사’를 차용해 창사로 쓴 것이 특징적이다. 청각적 미감이 두드러진 춤으로서 사신연, 사연을 비롯한 왕실의 연향에서 두루 공연되었으며, 무동의 주요 정재 종목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성무경, 이의강 번역, 『완역집성 정재무도홀기』, 보고사, 2005. 이혜구 역,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국립국악원, 『궁중무용무보: 6집』, 국립국악원, 1993. 이흥구ㆍ손경순, 『한국궁중무용총서: 7』, 보고사, 2009.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조경아(趙京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