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비의(半臂衣), 반수의(半袖衣), 작자(綽子), 탑호(搭護)
소매가 짧은 겉옷
우리나라의 반비는 고구려의 전신인 예(濊)·맥족(貊族)에 의해 자생한 기마 수렵의 융복ㆍ 방한의였던 맥수(貊袖)ㆍ마상의(馬上衣)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4〜5세기 〈안악3호분〉의 여주인과 〈삼실총〉의 남자 귀족이 반비를 입고 있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수(隋)나라 대업(大業, 605∼617) 연간 중에 내관(內官)이 장수의(長袖衣)를 입었는데, 당(唐) 고조(高祖)가 그 소매를 감하고 이르기를 반비라 하였으며, 이는 지금의 배자(背子)라고 기록되어 있다. 강회지간(江淮之間)에는 혹 작자(綽子)라 하여 사인(士人)들이 다투어 입었는데 그것은 수나라 때 처음 만든 것으로 요즘 풍속으로는 답호(褡護)라고도 하고 배심(背心)이라고도 한다.” 진대(秦代, 기원전 9세기∼기원전 206년)부터 착용된 반비는 소매가 크고 짧은 상의였는데, 당고조에 의해 소매가 없거나 반소매의 상의로 바뀌어 덧옷으로 착용한 모습은 당대에 많이 보이며, 호풍(胡風)의 유행과 관계가 있어 진대부터 반비가 착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반비에 관한 기록은『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 9년의 복식금제에서 나타난다. 표의(表衣)와 같은 고급직물로 만들어 입었으며, 평인은 남녀 모두 반비에 대한 금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평인 남녀는 착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소그드 상인에 의해 서아시아 복식이 전래된 반수의형 의복으로 평인남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착용하였다. 고려시대의 반비에 관하여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원나라 궁사(宮詞)에 고려양인 방령반비가 원나라에서 유행했으며, 『고려사』에는 신돈(辛旽, ?∼1372)이 반비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반비라는 명칭이 보이며, 반비가 답호, 배자(褙子), 더그레, 쾌자 등으로 변화되었다.
반비는 깃과 소매가 없거나 소매가 짧은 겉옷으로 조선시대에는 배자(褙子), 더그레, 답호, 쾌자(快子) 등으로 변화되었다. 834년 흥덕왕 복식금제 중 반비에 대한 금제에 의하면 진골대등(眞骨大等)은 계수금라(罽繡錦羅)를 금하며, 진골녀(眞骨女)는 계수라(罽繡羅)를 금한다. 육두품녀(六頭品女)는 계수라, 세라(繐羅)를 금하며, 오두품은 소문능시견포(小紋綾絁絹布)를 사용하며, 오두품녀는 계수금, 야초라(野草羅), 세라를 금한다. 사두품은 시견면주포(絁絹綿紬布)를 사용하며, 사두품녀는 소문능시견(小紋綾絁絹)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평인은 남녀 모두 반비에 대한 금제가 없다. 2003년 출토돤 누란(樓蘭)의 2∼5세기 반비 유물과 일본의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반비 유물을 참조하여 통일신라시대 반비의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반비의 형태는 소매는 반소매이며, 고름이나 매듭장식으로 여며 입는 직령교임형이고 길이는 가슴 바로 밑까지 오거나 무릎까지 오는 등 다양하며, 겉옷으로 착용되었고 방한용보다 장식용 으로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누란에서 출토된 반비는 견직물로 만들었으며, 길이는 88㎝, 너비는 64㎝이다. 우임이며, 소매 끝에 러플이 달려있다. 쇼소인에 소장된 반비는 직령교임형에 짧은 소매가 붙은 것과 소매가 붙지 않은 두 종류가 있으며, 길이가 다양하다. 아랫단에 란(襴)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대부분 악복(樂服)으로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립반비(持笠半臂)는 직령이며 란이 달려있고 허리에 달린 끈으로 우임으로 여며 입는다. 남자용 반비는 후세로 가면서 반소매가 없어지는 형태로 바뀌었으며, 여자용 반비 곧 배자는『사례편람(四禮便覽)』에 “배자는 색이 있는 명주와 견을 사용하여 만들고 깃은 마주 대하고 옆을 터놓으며 소매는 둥근 소매이거나 반소매 또는 소매가 없다. 우리나라 몽두의(蒙頭衣)가 그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어 반비와 배자 명칭이 혼용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오례의」에 의하면 답호(褡𧞤)는 곧 ‘반비의’라고 하며,『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에 “ 나장은 조건(皂巾)을 쓰고 청반비의를 입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조관(朝官)들이 일찍이 장복(章服) 안에 입었던 것이라고 하여 반비의가 관리들의 받침옷으로 입혀졌음을 알 수 있다. 1926년 순종의 소렴(小殮)용 의대로 마련한 반비의는 왕을 비롯하여 조관에 이르기까지 착용한 받침옷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1506년(연산군 12)에 “나장의 복색은 반비에 흑철릭을 착용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반차도에는 뒤와 옆모습만 표현되어 있어 앞모습을 알 수는 없으나 겨드랑이 아래부터 트여있어 세 자락으로 구성된 옷으로 여겨진다. 반비의 길이는 포의 길이에 맞춰 1700년대에는 길이가 짧아졌다. 색상은 『경종단의왕후부묘도감의궤(景宗端懿王后祔廟都監儀軌)』에만 청색이며, 나머지는 모두 흑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장이 겉에 입은 반비는 뒷중심과 옆선이 트여있는 세 자락의 옷으로 길이가 허리 아래부터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것도 있으나 안에 입는 포가 짧아짐에 따라 반비 역시 짧아졌다. 허리에는 조대(縧帶)나 포대(布帶)로 두르기도 하고, 반비의 앞자락을 뒤로 돌려 묶기도 했으며, 허리띠를 두르지 않고 입기도 했다. 신윤복(1758~?)의 혜원 풍속화 중 주막 안의 광경을 그린 〈주사거배(酒肆擧盃)〉의 나장은 청색 철릭 위에 흰색 줄무늬가 있는 흑색 반비를 입고 있다. 앞의 양옆 자락이 보이지 않으므로 앞자락을 뒤로 넘겨 묶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700년대 말 〈은진 송씨묘〉에서 출토된 반비는 목둘레는 U자형이며, 소매가 4∼5㎝ 달려있고 길이가 짧으며, 앞에서 작은 고름으로 여며 입었다, 솜을 두지 않고 제감으로 2㎝ 간격으로 곱게 누볐다.
〈이진숭(李鎭嵩, 1702~1756) 묘〉에서 출토된 방령더그레는 겹옷으로 반소매에 무가 있으며 뒤가 트여 있다. 마주보는 대금(對衿)형 방령(方領) 깃에 동정과 매듭단추가 없으며, 전체에 2.0~2.2cm 간격으로 누비가 놓여져 있다.
반비는 소매가 짧거나 없는 겉옷으로 고구려 〈안악3호분〉 4〜5세기 고구려 〈안악3호분〉 여주인과 〈삼실총벽화〉의 남자 귀족이 입고 있으며, 834년 흥덕왕 복식금제에 기록이 나타난다. 소그드 상인의 영향으로 당과 통일신라, 일본의 쇼소인까지 전해지고 유행하였던 평인 남녀를 제외하고 모두가 입은 반수의이다. 통일신라시대 반비의 형태는 반소매가 달려있고 고름이나 매듭장식으로 여며 입는 직령교임형이며, 길이는 다양하며, 겉옷으로 착용되었고 방한용보다 장식용으로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자용 반비는 후세로 가면서 반소매가 없어지는 형태로 바뀌었으며, 반비와 배자 명칭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답호, 배자, 더그레, 쾌자 등으로 변화되었다.
『삼국사기』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국립문화재연구소,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1999. 왕기(王圻), 『삼재도회(三才圖會)』, 민속원, 2004. 관근진융(關根眞隆) 지음, 문광희 옮김, 『일본 나라조 복식의 연구』, 경춘사, 2013. 최순우 외, 『한국미술전집 4』, 동화출판사, 1975. 김용문, 「반수의형(半袖衣型) 의복에 관한 연구」, 『한복문화』 24/4, 2021. 박윤미ㆍ임소연, 「조선 말기 나장복에 관한 연구」, 『복식』 66/1, 2016. 염순정, 「조선시대 반비류 복식을 응용한 디자인 연구」,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NHK, 『シルクロード展: 幼の都 樓蘭から 永遠の都 西安ヘ 』, 2005 나라국립박물관(奈良國立博物館), 『정창원전(正倉院展)』, 1989. 국가문화유산포털(www.heritage.go.kr/html). 국립민속박물관(www.nfm.go.kr/html). 국립중앙도서관(www.nl.go.kr/html).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www.portal.nrich.go.kr/html).
김용문(金容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