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신 사직단에서 사직제를 올릴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樂章], 춤[佾舞].
사직제례를 올릴 때 연주하는 제례 악무로써 <순안지악>ㆍ <숙안지악> ㆍ<옹안지악> ㆍ<수안지악>ㆍ <서안지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문(壝門) 안에 설치한 등가(登歌)와 유문(壝門) 바깥 북문(北門) 안에 설치된 궁가(宮架)(제후국:헌가) 두 악대로 나누어 연주하며 일무 <열문지무>와 <소무지무>를 수반한다.
사직제례악은 유교적 예제의 하나인 지기(地祇)에 대한 제례에 수반되는 악무이다. 사직제례악을 연주하는 곳은 국토의 신을 모신 사단(社壇)과 곡식의 신을 모신 직단(稷壇), 즉 사직단(社稷壇)이다. 궁궐의 왼쪽에는 종묘, 궁궐의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한다는 주례의 ‘좌조우사(左祖右社)의 원칙에 따라 사직단은 궁궐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매해음력 2월과 8월의 첫 번째 무일[上戊日] 및 동지 후 세 번째 미일(未日)에 제례를 거행한다. 사직제례악은 1116년(고려 예종 11)에 송나라에서 대성아악이 유입된 이후 아악만 연주하다가 명종대부터 향악을 교주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430년(세종 12)에 박연이 주도한 아악 정비 운동이 일어나면서 주례를 근거로 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다. 이는 음과 양의 원리를 따라 해당 선율을 연주하는 원칙 즉, 음양합성지제(陰陽合成之制)의 원칙에 따라 지기에 제사할 때, 헌가에서는 양(陽)에 속하는 “태주궁(太蔟宮)”의 선율을 연주하고, 등가에서는 음(陰)에 속하는 “응종궁(應鍾宮)”의 선율을 노래하도록 제례악을 정비한 것이다.
○ 역사 변천 과정 우리나라에서 사직제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사직제례악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처음 보인다. 사직제례악은 1116년(고려 예종 11)에 송나라에서 들여온 유사섭사례(有司攝事禮: 관리가 임금을 대신해 주관하는 제례) 사직제례악에 기초해 형성된 것이다. 고려시대의 사직제례악은 조선시대와 달리 영신례 때 <영안지곡(寧安之曲)>, 전폐례 때 <가안지곡(嘉安之曲)>, 진찬 때 <풍안지곡(豐安之曲)>, 초헌례 때 <가안지곡>, 문무가 나가고 무무가 들어올 때 <숭안지곡(崇安之曲)>, 아헌과 종헌례 때 <무안지곡(武安之曲)>, 송신례 때 <영안지곡>을 연주하였다. 악곡의 명칭에 ‘∼안(安)’ 자를 쓰는 것은 송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1430년(세종 12)에 박연이 주도한 아악 정비 운동이 일어나면서, 주례를 근거로 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다. 이는 음과 양의 원리를 따라 선율을 연주하는 음양합성지제(陰陽合成之制)의 원칙에 따라, 지기에 제사할 때 헌가(軒架)에서는 양(陽)에 속하는 “태주궁(太蔟宮)”의 선율을 연주하고 등가(登歌)에서는 음(陰)에 속하는 “응종궁(應鍾宮)”의 선율을 노래하도록 제례악을 정비한 것이다. 세종대에 아악을 정비하기 이전에는 등가, 헌가가 모두 태주궁(太蔟宮), 즉 ‘양’에 속하는 음으로 연주를 시작하고 마쳤으나 1430년의 아악 정비 이후로부터 음과 양을 조화롭게 하는 연주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태주(太:D4)와 응종(應:B4)은 십이지(十二支)로 말하면 인(寅)과 해(亥)에 해당하여 음과 양이 합한 것이다. 조선시대 사직제례악의 일무는 6일무로서 조선 전기에는 매 일(佾)이 8인 씩인 마흔여덟 명을 썼고, 후기에는 매 일이 6인씩인 서른여섯 명을 쓴 두 가지 사례가 보이지만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언한 이후에는 예순네 명이 추는 8일무 제도로 정착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 연주 시기 사직제례악은 사직제에 수반되는 악무이므로 사직제례 봉행일에 음악을 연주한다. 조선시대 대사(大祀)에 속했던 사직제례는 매년 입춘 후 다섯 번째 무일(戊日)과 입추 후 다섯 번째 무일에 제사를 지냈다. 무일에 사직제례를 지낸 이유는 무일이 오행(五行: 세상을 이룬다는 다섯 가지 원소. 水, 金, 地, 火, 木) 중 땅(地)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또, 동지(冬至) 후 대한(大寒) 사이 세 번째 미일(未日)에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십이지를 4개로 나눠 상생을 나타내는 삼합오행(三合五行) 가운데 조선을 상징하는 목덕(木德)에 들어가는 돼지(亥)·토끼(卯)·양(未) 중 모든 만물의 마감을 뜻하는 양(未)이 들어간 날을 납일(臘日)로 정해 제사를 지낸 것이다. ○ 연주 장소 사직제례는 사직단(社稷壇)에서 거행한다. 사직단은 주례의 좌조우사(左祖右社) 원칙에 따라 궁궐의 오른쪽에 위치한다. 현재는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해 있다. ○ 제례 절차에 따른 악무 사직제례악은 제례 절차 중 영신, 전폐, 진찬, 초헌, 아헌, 종헌, 철변두, 송신에서 일정한 음악과 악장을 연주하고 춤을 춘다. 사직제의 악장은 등가에서만 부르므로 전폐, 초헌, 철변두 절차에서만 노래한다. 영신(迎神)은 신을 맞이하는 절차로서 헌가에서 <순안지악(順安之樂)> 즉 “임종궁”, “유빈궁”, “응종궁”, “유빈궁”을 순서대로 연주하고 일무는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춘다. 전폐(奠幣)는 폐백을 올리는 절차로서 국사(國社)의 신위와 후토(后土), 국직(國稷)과 후직(后稷)의 신위에 각각 세 번 향을 올리고 이어 폐백을 올린다. 등가에서 음려에 해당하는 “응종궁”으로 <숙안지악(肅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는 <열문지무>를 춘다. 진찬(進饌)은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를 각각 생갑(牲匣)에 담아 올리는 절차이다. 익힌 고기를 올리기 때문에 국조오례의에는 이 절차를 ’진숙(進熟)‘이라 기록해 놓았다. 진찬 때 조(俎)가 처음 문에 들어올 때 헌가가 양률에 해당하는 “태주궁”으로 <옹안지악(雍安之樂)>을 연주한다. 국사단과 국직단에 각각 올리는데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의 순으로 올린다. 일무는 없다. 초헌(初獻)은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이다. 등가에서 음려에 해당하는 “응종궁”으로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는 <열문지무>를 춘다. 국사와 후토, 국직과 후직의 각 신위에 첫 번째 술잔을 올리고 대축(大祝)이 축문(祝文)을 각각 낭독한다. <열문지무>가 나가고 <소무지무(昭武之舞)>가 들어올 즈음 헌가에서 양률인“태주궁”으로<서안지악(舒安之樂)>연주한다. 아헌(亞獻)은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이다. 헌가에서 양률인 “태주궁”으로 <수안지악>을 연주하고 일무는 <소무지무>를 춘다. 종헌(終獻)은 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이다. 헌가에서 양률인 “태주궁”으로 <수안지악>을 연주하고 일무는 <소무지무> 춘다. 철변두(撤籩豆)는 변(籩)과 두(豆)를 거두는 절차로서 실제 의례 때에는 변과 두 한 개씩을 약간 옮겨 놓는 상징적 행위로 대신한다. 등가에서 음려에 해당하는 “응종궁”으로 <옹안지악>을 연주하고 일무는 없다. 이 때의 옹안지악은 진찬에서 “태주궁”으로 연주하는 <옹안지악>의 선율을 조옮김한 것이다. 다만, 아악을 조옮김 할 때 황종(黃:C4)에서 청협종(浹:D#)의 범위를 넘어가는 음은 한 옥타브 내려 연주하므로, 실제로는 전혀 다른 선율처럼 들린다. 송신(送神)은 신을 보내는 절차이다. 송신에는 헌가에서 <순안지악>을 “송임종궁”으로 연주한다. 송임종궁은 신을 보내는 송신 절차에서 연주하는데, 영신례 때 연주하는 임종궁과는 다른 형태의 선율로 이루어져 있다. 일무는 없다. 〈사직제례 절차에 따른 악대 악곡 악무〉
절차 | 악명 | 악곡명 | 악현 | 일무 |
영신 | 순안지악 | 임종궁, 유빈궁, 응종궁, 유빈궁 | 헌가 | 열문지무 |
전폐 | 숙안지악 | 응종궁 | 등가 | 열문지무 |
진찬 | 옹안지악 | 태주궁 | 헌가 | - |
초헌 | 수안지악 | 응종궁 | 등가 | 열문지무 |
문무퇴(退)무무진(進) | 서안지악 | 태주궁 | 헌가 | |
아헌 | 수안지악 | 태주궁 | 헌가 | 소무지무 |
종헌 | 수안지악 | 태주궁 | 헌가 | 소무지무 |
철변두 | 옹안지악 | 응종궁 | 등가 | |
송신 | 순안지악 | 송임종궁 | 헌가 |
○ 일무 사직제례 일무는 문덕을 기리는 <열문지무>와 무공을 기리는 <소무지무>가 있다. 영신, 전폐, 초헌에 <열문지무>를 추고, 아헌, 종헌에 <소무지무>를 춘다. <열문지무>를 출 때는 약(籥)과 적(翟)을 들고 추는데 약을 가로로 하여 안쪽으로 잡고, 적은 세로로 하여 바깥쪽으로 잡는다. 이는 인의(仁義)와 경위(經緯)의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약을 안쪽에 위치하고 적을 바깥쪽에 위치하도록 하는 것은 경륜은 안에서 운영되고 문장은 바깥에서 선양됨을 나타낸다. <소무지무>를 출 때는 간(干)과 척(戚)을 들고 추는데, 척을 안쪽으로 간을 바깥쪽으로 잡는다. 용감함은 안에서 앞장서고, 방어함은 바깥에서 막는 것을 상징한다. ○ 선율 《사직제례악》의 선율은 십이율 사청성(十二律 四淸聲)에 해당하는 음역, 즉 황종(黃:C4)으로부터 청협종(浹:D#5) 범위 내의 음으로 선율을 구성한다. 이 음역을 넘어설 때는 한 옥타브를 내려 연주한다. 악장(樂章)이 있는 경우 한 글자에 음 하나를 배치해[一字一音] 부르며, 곡마다 네 음이 한 구를 이루고[四音一句] 여덟 개의 구가 한 곡을 이룬다. 아악곡 선율의 구성 방식인 기조필곡(起調畢曲) 원리를 따라, 선율을 시작하는 음과 마치는 음이 같다.
사직제의 악장(樂章)은 등가(登歌)에서만 부르게 되어 있어 폐백을 올리는 절차인 전폐(奠幣)와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初獻), 제기를 거두는 철변두(撤籩豆) 절차에만 있다. 전폐례 때 연주하는 <숙안지악(肅安之樂)>의 악장은 ‘곤후재물(坤厚載物)’로 시작하며, 초헌례 때 연주하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의 악장 중 국사(國社)신을 위한 것은 ‘지재곤원(至哉坤元)’으로 시작하고, 국직(國稷)신을 위한 것은 ‘탄강가종(誕降嘉種)’으로 시작한다. 이들 악장의 내용은 땅의 덕이 두터워 만물을 실을 수 있고, 아름다운 종자를 내려 모든 백성이 덕을 입는다는 감사의 마음, 복을 내리고 수(壽)와 강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사직제례악은 조선시대에 지기(地祇)를 제사하는 대표적인 제사로서 종묘와 함께 국가를 상징하는 용어로 쓰일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 또 여러 제사 가운데 아악을 연주하는 제사의 특징을 두루 구비하고 있다. 사직제례가 일제강점기에 폐지됨에 따라 제례악 연주도 중단이 되었지만 1988년에 복원이 되었다. 처음에 복원이 되었을 때에는 음악을 종묘제례악을 연주했으나 2011년에 고증에 의해 다시 아악을 연주하여 옛 전통을 회복하였다. 2014년에는 국립국악원의 국악연구실에서 18세기 사직서의궤의 기록에 따라 18세기 사직제례악을 재현한 바 있다.
사직대제: 국가무형문화재(2000).
『국조오례서례』 『국조오례의』 『국조오례통편』 『대한예전』 『사직서의궤』 『세종실록』 『세종실록오례』 『악학궤범』 『증보문헌비고』 『춘관통고』
김문식, 송지원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송지원, 『조선왕실의 음악문화』, 세창출판사, 2020. 지두환·송지원 외 『사직대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송지원(宋芝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