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혁대(烏革帶), 오야대(烏也帶), 은야대(銀也帶)
속악의 악사와 악공이 두르던 검은색[烏] 가죽띠[鞓]로 만든 허리띠[帶]
조선 시대 속악(俗樂)을 사용하는 제례(祭禮)와 궁중 연향 등에서 음악을 담당한 악사(樂師)와 악공(樂工)이 녹색과 홍색의 길이가 긴 겉옷[衫]을 입은 후 허리에 두른 띠이다. 가죽과 나무를 재료로 하여 검은색으로 띠바탕[鞓]과 띠돈[鉤]을 만들고, 띠고리가 있다. 착장할 때는 띠고리를 띠바탕의 구멍이나 별도로 부착된 속띠[보조대]의 구멍에 끼웠고, 끝부분이 허리 뒤로 드리워져서 ‘야(也)’자 모양과 같게 했다. 띠돈은 전기에 총 아홉 개인데, 후기에 그 수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세조 때 종묘제례의 전악(典樂)이 착용하도록 정해졌고, 『국조오례의』에서는 속악의 악사가 착용하게 했으며, 『악학궤범』에서는 속악의 악사와 악공이 착용하게 했다. 조선 후기에도 악인 복식으로 계속 착용되지만 형태와 착장법의 변화도 있고(속띠의 유무와 사용, 기량(起梁)의 유무, 띠의 길이, 띠돈의 수와 테두리 등), 전악과 악공이 은야대(銀也帶)[오야대(烏也帶)]와 오정대로 분화되기도 하며, 평상시 착용하던 실로 엮은 가는 띠를 두르기도 하다가, 국말에는 악공이 백색 중단 대신 남색 창의를 받침옷으로 입게 되면서 오정대가 남사대(藍絲帶: 남색 견사로 엮은 허리띠)로 대체되었다.
○ 유래
오정대는 가죽으로 만든 띠 즉 혁대(革帶)의 일종이다. 가죽과 직물이 결합된 띠바탕을 주로 ‘정(鞓)’이라 했다. 띠돈은 대전(帶錢)ㆍ과판(銙版)ㆍ과(銙)ㆍ구(鉤)ㆍ정(鞓)으로 쓴다. 따라서 정(鞓)은 때로 띠의 본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 본체 위에 붙인 띠돈을 의미하기도 했다. 띠돈 중에서 혁대 끝에 있는 장방형은 타미(䤩尾; 撻尾)라고 하는데, 당(唐) 고조(高祖)가 문무백관이 요대(腰帶)를 두를 때는 타미가 아래쪽을 향해 드리워지게 함으로써 ‘순하(順下)’, ‘순합(順合)’ 즉 ‘신하가 되어 군주에게 복종한다[臣服]’는 의미를 담게 했다. 혁대의 타미가 아래로 드리워지는 형태는 그 착용한 모습이 ‘야(也)’자(字)와 같아 ‘야자대(也字帶)’[음: 야짜대] 혹은 ‘야대(也帶)’라고 했다. 야자대에는 띠고리를 끼우는 좁고 짧은 속띠[보조대]가 따로 달린 경우가 있다. 이렇게 해서 혁대는 가죽과 그 겉을 감싼 직물로 된 띠바탕, 띠 전체에 올려 장식하는 띠돈, 허리 앞의 고정 장치인 띠고리로 구성되었다.
악무복에서 혁대는 고려시대에 송(宋)에서 보낸 복식에서 확인된다. 혁대 중 야자대는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에 관원의 공복(公服)에 사용되었고, 조선 시대 『악학궤범』(1493년)에 악사와 악공의 허리띠로 수록된 오정대ㆍ기량대(起粱帶)ㆍ금동혁대(金銅革帶: 홍정대(紅鞓帶)ㆍ녹정대(綠鞓帶))ㆍ처용관복의 대(帶)가 모두 야자대의 형태였다.
○ 쓰임 및 용도
오정대의 착용상황 및 신분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에는 7~9품 백관의 공복에 착용하였다. 조선 시대 악무(樂舞) 복식에서는 세종 때 전정(殿庭) 헌가와 고취(鼓吹)의 악공복으로 정해졌고, 세조 9년(1463)에는 종묘제례의 악무를 문무 보태평과 무무 정대업으로 정하면서 전악(典樂)의 허리띠로 정해졌다. 『국조오례의』(성종 5년. 1474)에서는 종묘ㆍ영녕전ㆍ문소전 속악 등가의 악사가 착용하게 했다. 『악학궤범』(성종 24년. 1493)에서는 악사의 공복(公服)과 전정 헌가ㆍ고취ㆍ연향(宴享)ㆍ관사(觀射)ㆍ행행(幸行)ㆍ사악(賜樂)ㆍ개성부에서 중국 사신을 영명(迎命) 등 상황에서의 악공복으로 정해졌다.
조선 후기에는 전악과 악공이 오정대를 계속 착용했는데, 19세기 중반에 전악의 ‘은야대[오야대]’와 악공의 ‘오정대’로 구분되고, 형태도 차별화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악공이 남색 받침옷을 입게 되면서 오정대가 남사대로 대체되었다. 이로써 말기에는 악사가 녹색 옷에 야자대를 착용하고 악공이 홍색 옷에 남사대를 착용하였고, 오정대는 쓰지 않게 되었다.
일습(一襲)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오정대를 두를 때 입는 겉옷의 색(色)은 녹색과 홍색이다. 녹색의 녹초삼(녹색 초(綃)로 만든 단령(團領))은 악사가 입고, 홍색의 홍주삼(홍색 주(紬)로 만든 단령)은 악공이 입었다.
조선 전기 세종~성종 기간에 정해진 속악 악사의 복식은 제복(祭服)ㆍ공복(公服)ㆍ시복(時服)ㆍ두건에 단령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공복ㆍ복두ㆍ녹초삼ㆍ흑화(黑靴) 차림에 오정대를 둘렀다. 악공의 복식은 두 종류가 있고 허리띠도 각각 다르다. 종묘와 영녕전의 등가와 헌가에서는 개책ㆍ비난삼(緋鸞衫: 붉은색 난봉문이 있는 단령)ㆍ백주중단(백색 주(紬)로 만든 중단)ㆍ백포말(백색 베로 만든 버선)ㆍ오피리(검은색 신울만 있는 가죽신)에 백초대(백색 초(綃)로 만든 허리띠)를 둘렀고, 앞서 언급한 헌가ㆍ고취ㆍ연향 등 기타 상황에서는 화화복두(畵花㡤頭)ㆍ소화(小花) 흉배 부착 홍주의(紅紬衣)[홍주삼(紅紬衫)]에 오정대를 착용했다.
조선 후기에는 제례의 악무복에서 오정대는 확인되지 않고, 연향 자료에서 확인된다. 순조 9년(1809) 『기사진표리진찬의궤』와 순조 27년(1827) 『자경전진작정례의궤』까지 전악이 모라복두(冒羅幞頭)ㆍ녹초삼ㆍ오정대ㆍ흑피화를 착용하고, 악공이 화화복두ㆍ홍주의ㆍ오정대ㆍ흑피화를 착용해서, 악사와 악공이 모두 오정대를 썼다. 그런데 순조 28년(1828) 무자 진작과 순조 29년(1829) 기축 진찬에서는 전악과 악공의 복식이 두 종류가 있어, 연회 장소에 따라 다르게 입고 허리띠도 구분되었다. 오정대 외에 전악은 은야대(銀也帶)가 추가되었고, 악공은 금동야대가 추가되었다. 그 후 다시 변화가 있어, 악사는 헌종 4년(1848) 무신 진찬 이후 광무 6년(1902) 임인 진연까지 모라복두ㆍ녹초삼ㆍ흑(피)화에 은야대를 썼다. 악공은 헌종 4년 무신 진찬, 고종 5년(1868) 무진 진찬, 고종 14년(1877) 정축 진찬, 고종 24년(1887) 정해 진찬까지 화화복두ㆍ홍주의ㆍ흑화에 오정대를 썼다. 전악은 은야대, 악공은 오정대로 구분된 것이다. 전악의 야자대는 이후 국말까지 유지된다. 이에 비해 악공복은 다시 변화를 보여, 고종 29년(1892) 임진 진찬부터 광무 6년 임인 진연까지 화화복두ㆍ홍주의ㆍ남창의(藍氅衣)ㆍ흑화에 남사대를 둘렀다. 백색 중단 대신 남색 창의를 받침옷으로 입게 되면서 그에 짝하는 남사대를 두른 것이다. 이로써 전악의 허리띠는 은야대, 악공의 허리띠는 남사대가 되었고, 오정대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 형태와 재료
『악학궤범』 권9 「관복도설(冠服圖說)」에는 ‘오정대’ 도설이 있다. 도식을 보면, 띠바탕[鞓]ㆍ띠돈[鉤]ㆍ띠고리ㆍ속띠로 구성된다. 띠돈은 총 아홉 개로, 중앙(착용시 허리 뒤쪽)에 직사각형 일곱 개와 원형 한 개가 있고, 띠 끝에 중앙의 띠돈보다 좀 더 긴 직사각형 한 개가 있다. 설명을 보면, “나무로 구(鉤)를 만들고, 흑칠을 한다(以木爲鉤, 黑漆)”라 하였다. 처용관복의 ‘대(홍정대)’ 도식을 근거로 보면, 여기서의 ‘구’는 띠고리가 아닌 띠돈이다.
한편, 오정대의 재료와 만드는 방식은 탁지준절을 참조할 수 있다. 전악과 악공의 오정대 재료와 소요량이 나타나는데, 생우피(生牛皮) 온전한 길이[全]에 너비 1촌 2분짜리 2조각, 노루가죽[獐皮] 길이 1척에 너비 1촌짜리 한 조각, 가는 구리실[細銅絲], 굵은 구리실[大銅絲], 얇은 소나무판[薄松板], 아교와 송연(松烟: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두석(豆錫), 석자황(石紫黃), 명유(明油), 재[炭]를 썼다. 재료에 직물이 없고 가죽만 있으므로, 오정대의 띠바탕[烏程]이 가죽으로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생우피의 소요량이 많으므로 띠바탕의 재료로 쓰고, 노루가죽은 속띠의 재료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소나무판으로 띠돈을 만들고, 가죽과 띠돈은 재ㆍ송연ㆍ아교ㆍ명유 등으로 검게 빛을 내고, 두석으로 띠고리를 만들고, 굵고 가는 구리실로 엮어서 완성했을 것이다. 1809년(순조9) 『기사진표리진찬의궤』 오정대 도식을 보면, 속띠가 없는 형태인데, 띠바탕에는 세로줄인 양(梁)이 금색으로 표현되어 있고, 띠돈의 가장자리도 금색으로 테두리가 그려져 있다. 이 금색은 탁지준절 재료를 보면 석자황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1809년 『기사진표리진찬의궤』와 1828년 『(무자)진작의궤』의 오정대는 전악과 악공이 속띠가 없는 형태를 함께 착용했는데, 원형 띠돈이 앞쪽에 세 개, 타미 위쪽에 세 개가 있어 전기보다 띠돈의 수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1848년 『(무신)진찬의궤』와 1877년 『(정축)진찬의궤』에서는 전악과 악공의 허리띠가 구별되는데, 전악은 속띠와 양이 있는 은야대(銀也帶)를 쓰고, 악공은 속띠와 양이 없는 오정대를 썼다.
○ 착장 방식
띠고리를 속띠의 구멍에 끼워 채우고, 속띠 아랫부분의 띠바탕 약 1/3과 끝에 부착한 띠돈인 타미(䤩尾)를 아래로 드리웠다. 19세기 이후 속띠가 없는 구조에서는 띠고리의 날름쇠를 띠바탕의 구멍에 직접 끼우고 타미를 아래로 드리웠다. 착장하고 나면 띠의 끝은 허리 뒤쪽 아래로 길게 드리워서 ‘야(也)’자 모양과 같게 되었다. 길이는 타미 끝이 무릎 위에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땅에 닿는 경우도 있어, 시기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속악의 악사와 악공이 특정 복식을 입을 때 두르던 허리띠이다. 착장했을 때 띠의 끝이 뒤쪽 허리 아래로 드리워져 ‘야(也)’자와 같은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는 전악이나 악공에 관계없이 동일했다가, 후기에 전악의 은야대와 악공의 오정대로 양분되었고, 국말에 남사대로 대체되었다. 형태는 전기와 후기에 띠돈의 수, 속띠와 양의 유무, 길이에 변화가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세종실록』 『세조실록』
서한석 역주, 한국음악학학술총서 제11집:역주 기사진표리진차의궤, 국립국악원, 2013. 고유정, 「조선시대 궁중악인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이은주, 「조선시대 품대의 구조와 세부 명칭에 관한 연구」, 服飾61/10, 2011.
최연우(崔然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