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文舞), 무무(武舞), 아무(雅舞), 줄춤
국가의 큰 제사나 연향 때, 여러 명의 무용수가 줄과 칸을 이루어 추는 춤
고려부터 현재까지 국가 의례인 제례에서 여러 명의 무용수가 가로와 세로로 대열을 이루어 추는 춤 형식이다. 문인(文人)으로서 갖춘 위엄과 덕망을 표현하는 문무와 무공(武功)을 상징하는 무무의 두 종류가 있다. 일무는 제례를 주재하는 이(황제, 제후)의 신분과 직접 참석 여부(친행, 섭행)에 따라 규모와 내용을 달리하고, 춤으로써 신과 사람이 소통하고 화합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일무는 중국 주(周)나라 때의 제례 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려 예종(睿宗) 11년(1116)에 중국 송(宋)나라로부터 수입되었고, 조선 시대로 계승되었다. 대부분의 제례에는 아악(雅樂)이 연주되는 가운데 일무가 추어졌으므로 아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아무의 명칭은 <열문지무(烈文之舞)>, <소무지무(昭武之舞)>이다. 사직대제(社稷大祭), 석전(釋奠) 의례 때 아악기로 연주되는 아악 반주로 일무가 추어졌다.
조선의 세종(世宗, 1418~1450)은 ‘조상께서 돌아가시면, 생전에 듣던 음악은 듣지 못하고, 갑자기 중국식 제사 음악만 듣게 되니 조상께서 즐길 수 없다’며 새로운 음악과 춤이 필요하다는 뜻을 세우고, 생전에 듣던 음악인 향악(鄕樂)과 고취악(鼓吹樂)을 기반으로 한 제례악과 제례 일무인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와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와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새로 제정하였다. 이것이 현재 종묘(宗廟) 제례 때 연주되는 일무이다.
이 일무는 임금과 신하 간의 화목을 위한 회례연(會禮宴), 중국 사신을 위로하는 사신연(使臣宴), 제사 후에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음복연(飮福宴) 등 연향에서 연행되다가 1464년(세조 10) 정월부터 종묘 제례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일무는 고려와 조선시대 궁중에서 실시되는 제례에서 추어졌다.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아악부에서 전승하였고, 현재는 국립국악원을 비롯한 일무보존회 등의 민간 단체에서 연행하고 있다.
일무는 문무와 무무, 두 가지 춤이 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무와 무무는 다시 그 행렬의 줄 수에 따라서 팔일(八佾)․육일(六佾)․사일(四佾)․이일(二佾)의 대열 구성으로 나뉜다.
팔일은 가로 여덟 명 세로 여덟 명이 정사각형의 대형을 이룬 모습이다. ‘8’은 동양에서 길(吉)하여 좋은 것으로 여기는 숫자다. 팔일무는 하늘로부터 천하를 지배하도록 명령을 받은 황제(천자(天子)의 위상을 나타내고, 천자가 베푸는 문덕의 정치와 국가를 수호하고 안정시킨 무공의 혜택이 만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춤이다.
육일무는 제후(諸侯: 국왕), 사일무는 경대부(卿大夫: 고위급 벼슬), 이일무는 사(士: 낮은 벼슬)의 제례에 연행하여 위상에 따라 일무의 규모를 달리하였다.
육일무 이하의 형태는 두 종류가 있는데, 가로에 여섯 명‧네 명‧두 명의 무용수가 기준이 되고, 그 뒤로는 똑같이 여덟 명씩 줄을 서는 복건(服虔, 미상. 동한(東漢) 시대 인물)의 방식이 있고, 가로와 세로의 인원을 동일하게 6×6, 4×4, 2×2인씩 정렬한다는 두예(杜預, 222~284)의 방식이 있다.
일무가 처음 도입된 고려 예종 때(1116년)는 6열 6줄로 서른여섯 명의 무용수가 대열을 이루었다가, 의종(毅宗, 1127~1173) 때에는 6열 8줄로 마흔여덟 사람의 무용수가 대열을 이룬 육일무를 춤추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선례를 따라 6×8의 육일무를 추었다. 1464년 정월부터는 종묘와 영녕전에서 6×6의 육일무로 바뀌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10월 12일 이후에는 대사(大祀)인 종묘ㆍ영녕전 제사와 사직대제, 원구단(圜丘壇) 제사에서는 황제의 격식을 갖추어 팔일무를 추고, 석전제는 중사(中祀)의 위계를 유지하여 육일무를 추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는 종묘와 영녕전 제사의 일무는 육일무로 격이 낮추어졌고, 사직단과 원구단 제사는 1908년(순종 2) 일본의 강압으로 모두 금지되었다. 반면 본래 육일무를 추던 석전제는 1928년 가을 제사부터 팔일무로 격을 높였다.
현재는 종묘대제와 사직대제, 석전대제에 모두 팔일무를 추고 있다.
조선 시대 제례는 예식의 순서에 따른 음악과 일무가 정해져 있어서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각각 연행되었다. 문덕과 무공을 표현하는 내용은 악장(樂章)의 노랫말로써 나타냈다.
제사 순서 | 악대 위치 | 종묘 (속악) | 사직 (아악) | 석전 (아악) | 일무 |
영신 (신 맞이) | 헌가 (軒架) | 보태평지악 보태평지무 | 순안지악 (順安之樂) 열문지무 | 응안지악 (凝安之樂) 열문지무 | 문무 |
전폐 (폐백 올림) | 등가 (登歌) | 보태평지악 보태평지무 | 숙안지악 (肅安之樂) 열문지무 | 명안지악 (明安之樂) 열문지무 | 문무 |
진찬 (음식 올림) | 헌가 | 풍안지악 (豊安之樂) | 옹안지악 (雍安之樂) | 풍안지악 | 없음 |
초헌 (첫 잔 올림) | 등가 | 보태평지악 보태평지무 | 수안지악 (壽安之樂) 열문지무 | 성안지악 (成安之樂) 열문지무 | 문무 |
아헌 (둘째 잔 올림) | 헌가 | 정대업지악 정대업지무 | 수안지악 소무지무 | 성안지악 소무지무 | 무무 |
종헌 (마지막 잔 올림) | 헌가 | 정대업지악 정대업지무 | 수안지악 소무지무 | 성안지악 소무지무 | 무무 |
철변두 (제기를 물림) | 등가 | 옹안지악 | 옹안지악 | 오안지악 (娛安之樂) | 없음 |
송신 (신을 되돌려 보냄) | 헌가 | 흥안지악 (興安之樂) | 순안지악 | 응안지악 | 없음 |
일무에 있어서 동작은 무구를 사용하는 법칙에 따라 전개된다. 문무에 해당하는 〈열문지무〉와 〈보태평지무〉의 무용수는 왼손에 약(籥)을 잡고, 오른손에 적(翟)을 잡고 춤춘다. 약과 적을 양손에 쥐고 춤추는 동작을 통해 문치(文治)의 덕화(德化)를 묘사하고 상징할 수 있다고 여겼다. 사직과 문묘 제사 등에서 춤추는 〈소무지무〉에서는 무용수가 방패와 도끼인 간․척(干戚)을 잡고 춤춘다. 〈정대업지무〉의 무구는 검(劒)․창(槍)․궁시(弓矢)이다. 무용수가 무기를 잡고 춤추는 것은 외부의 위험에 방어하고 무력으로써 나라를 지키는 모습을 상징한다.
종묘, 사직, 석전 등에서 춤추는 일무는 천지인(天地人) 사상 중 사람의 역할을 나타낸 부분이다. 제례 대상인 신이 강림하여 사람들의 정성을 받아 즐기고, 되돌아가기까지 질서 있게 전개된다. 국가 및 백성들에게 태평안락의 복이 이르기를 기원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석전대제: 국가무형문화재(1986) 사직대제: 국가무형문화재(2000) 종묘제례악 보태평지무・정대업지무: 국가무형문화재(1964), 종묘제례악 :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2001) (2008년부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변경)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釋奠大祭)』,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송지원ㆍ이숙희ㆍ김영숙,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송혜진, 『한국 아악사 연구』, 민속원, 2000. 이종숙, 『종묘제례악 일무의 왜곡과 실제』, 민속원, 2012. 임학선, 『문묘일무의 예악사상』,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1. 지두환ㆍ송지원ㆍ최숙경ㆍ박원모, 『사직대제ㆍ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