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농악
전라도 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농악 공연 문화와 연행 양식을 포괄하여 이르는 말
호남농악은 동서로 특징이 대비된다고 알려졌으며, 학계에서는 호남의 농악 문화권(文化圈)을 전승 맥락과 공연양식의 대비적 특징에 따라 크게 《좌도농악》과 《우도농악》, 두 권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좌도농악》은 전라도 북동부 내륙 산간지대 중심으로 자리한 일대에서 전승하는 농악을 지칭한다. 《우도농악》은 지리적으로 전라도 서부 평야지대 및 일부 해안 지대 일대에서 전승하는 농악을 지칭한다. 이 외,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도에 속하지만 충청도나 경상도와 같은 타지방에 접경한 지역 농악에서는 일종의 문화 접변 양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같은 전라남도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남해 도서 지역 농악은 내륙의 것과 사뭇 다른 형태 및 내용의 농악을 전승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농악은 안녕(安寧)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기능과 더불어 노동의 효율성, 화합을 위한 공동 놀이 등의 다양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는 문화 양식의 하나로 존재했다. 현재를 중심으로 농악은 연행 주체와 배경 그리고 형태와 내용에 따라 지역 또는 집단으로 비교 구별이 되고 있지만, 문화적 성격 면에서 본다면 형성기부터 ‘공동성’이란 큰 보편성을 내재하고 전승, 전파되어 온 예술양식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사회 전반에서 큰 지각 변동이 발생하고, 문화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게 되는데, 농악에서도 새로운 시대를 반영한 변이 양상이 여러 면모로 나타났다. 농경을 중심으로 촌락을 이루어 삶을 영위하는 사회 구성 및 형태가 상당한 변화를 겪는 와중에, 당대 농악 전승집단의 대응과 선택에 따라 농악 전승 맥락에도 이전에 없던 현상들이 출현한다. 호남농악도 크게 문화적 층위에서 연행하는 마을농악과 예술 층위에서 연행하는 전문 연예농악, 두 계통으로 나뉘어, 이후 뚜렷한 대비적 흐름을 보이게 되었다. 《우도농악》 권역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문 연예농악 공연집단이 형성되어 활동하면서 지역 내 상호 보편성이 강한 공연양식을 보유한 채 현재는 행정 구획에 따른 지역 기반으로 전승되고 있다. 《좌도농악》은 전승지의 지리적 위치와 전승 배경이 권역 내에서도 서로 변별되는 변천사를 겪으면서, 농경 마을사회 중심의 문화 전통을 계승하는 마을굿 유형의 농악과 전문 연예농악을 연행하는 포장걸립굿 유형의 농악이 함께 전승되고 있다. 한편, 전라남도 해안 도서 지역 일부에서는 《신청(神廳)농악》, 《군고(軍鼓)》, 《가장(假裝)농악》 등의 상대적으로 희소(稀少)한 농악을 전승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는 거시적 측면에서 농악의 기본 성격이 문화양식과 예술양식의 서로 다른 층위로 갈리는 국면을 가져왔다. 과거 농악 본연의 문화 전통을 유지하는 농악과 상대적 개념의 ‘전문 연예농악’이 근대 이후 농악 전승 맥락에 새 축을 세우게 된 것인데, 전문 연예농악은 직업적인 농악인들이 단체를 형성하고 경제 수입을 목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방문, 순회하며 벌이는 걸립농악 연행을 말한다. 호남농악이 《우도농악》과 《좌도농악》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차이를 형성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 전라도 서부에 속하는 지역 중심으로 전문 연예농악이 성행하게 되면서 발생한 일로 보인다. 전통적인 문화 행사에서 전문 연예농악으로 변천한 경향은 전국의 농악 분포 지역 중에서도 현재 《호남우도농악》 전승지로 분류되는 정읍ㆍ김제ㆍ부안ㆍ고창ㆍ영광 등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반면에 현재 《호남좌도농악》 전승지로 분류되는 대표 지역 중에는 남원농악의 경우만 해방 직후에 전국을 돌며 포장 걸립 형태의 농악을 연행하면서 일찌감치 전문 연예농악의 길로 들어섰고, 임실ㆍ진안ㆍ구례ㆍ곡성 등의 지역은 비교적 늦게까지 공동체 문화의 전통 맥락을 유지하며 농악을 연행해 온 흐름을 보였다. 《호남우도농악》은 1900년대 초반까지 김도삼ㆍ김바우ㆍ최화집, 이 세 명의 상쇠가 각자의 농악 공연지(公演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걸립농악과 마을 토착농악 양면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도삼의 계보는 정읍과 김제지역을 중심으로, 김바우 계보는 부안지역을 중심으로, 최화집 계보 농악은 전북의 고창, 전남의 영광ㆍ광주 등의 공연자들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현재 《우도농악》 전승지역은 지자체 행정단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예컨대, 《영무장농악》이라는 이름으로 고창ㆍ영광ㆍ장성ㆍ함평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공연 특성 및 활동권을 공유했던 전통이 현재는 행정구역 개편과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개별 지역단위 농악 지정으로 《영광농악》, 《고창농악》 등의 명칭으로 구별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김도삼 상쇠 계통의 농악을 공유하는 정읍ㆍ김제ㆍ익산 등도 현재 각각이 독립된 지역 농악으로 전승되고 있다. 현재 《우도농악》 권역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지정단체가 1곳, 지자체 지정 무형문화재 단체가 전북에 5곳, 전남에 2곳이 있다.
《호남좌도농악》은 특정 인물 계보로 계통을 구분하기는 어렵고, 전승지의 문화지리적 형세와 문화전통, 전승맥락에 따라 각자의 고유성을 형성하고 있다. 임실군 강진면에 소재한 필봉마을에서 전승해 오는 《임실 필봉농악》, 진안군 성수면에 소재한 중평마을에서 전승해 오는 《진안 중평농악》, 남원시 금지면 옹동마을에서 전승해 오는 《남원 금지농악》, 곡성군 곡성읍 소재 죽동마을에서 전승해 오는 《곡성 죽동농악》, 전남 구례읍 신원리 신촌마을에 전승되어온 《구례 잔수농악》, 《화순 한천농악》과 《여수 백초농악》 등이 현전 《호남좌도농악》에 드는 지역 농악이다. 《호남좌도농악》은 마을사회에서 성립한 농악대에 의한 전승이 타 농악문화권보다 비교적 오래 전승되어 온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마을 공동 제의와 놀이, 생활방식 등 생활문화양식과 분리하기 어려운 문화적 층위에서 이해할 때 본연의 존재 방식과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좌도농악》 전승지역의 공통 특징은 《당산굿》ㆍ《샘굿》 등 마을 공동 제의에서 농악이 주요한 역할을 하며, 마당밟기ㆍ기굿ㆍ《두레굿》ㆍ《대보름굿》ㆍ걸궁굿ㆍ《판굿》 등 다양한 공연양식이 연행된다는 점이다. 또 개인기보다 공동성을 중요시해서 개인놀이보다 집단놀이가 중심이 되는 판제이며, 밑놀이보다 윗놀이가 발달된 것이 특징이다 뒷치배[잡색]의 배역과 연희가 타지역 농악에 비해 발달하였고, 사회극과 같은 성격을 강하게 띤다. 현재 《좌도농악》 권역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농악이 임실ㆍ남원ㆍ구례 이상 3곳, 지자체 지정 무형문화재 농악이 전남 곡성ㆍ화순 이상 2곳 있다.
구분 | 《호남우도농악》 | 《호남좌도농악》 | |||||
《정읍》 | 《이리》 | 《영광》 | 진안 《중평》 | 임실 《필봉》 | 남원 《금지》 | ||
기(旗) | 농기수 | 농기수 | 농기수 | 농기수 | 농기수 | 농기수 | |
용기수 | 용기수 | 용기수 | 용기수 | ||||
영기수1‧2 | 영기수1‧2 | 영기수1‧2 | 영기수1‧2 | 영기수1‧2 | 영기수1‧2 | ||
단기수 | 단기수 | 설명기수1 | 단기수 | 단기수 | |||
오방기수5 | |||||||
나발 | 나발수 | 나발수 | 나발수 | 나발수 | 나발수 | 나발수 | |
새납 | 새납수 | 새납수 | 새납수 | 새납수 | |||
쇠 | 상쇠 외 부쇠... | 상쇠 외 부쇠... | 상쇠 외 부쇠... | 상쇠 외 2인 | 상쇠 외 2~5인 | 상쇠 외 2~5인 | |
징 | 수징 외 | 수징 외 | 수징 외 | 수징 외 1인 | 수징 외 1~2인 | 수징 외 1~3인 | |
장구 |
수장고 부장고... |
수장고 부장고... |
수장고 부장고... |
수장고 외 3인 | 수장고 외 3인~7인 | 수장고 외 3~7인 | |
북 | 북수 | 대북 | 통북 | 북수 2인 | 수북 외 1~3인 | 0~4인 | |
법고 |
수법고 부법고 |
밀북/법고 | |||||
소고 | 고깔 | 팔법고 | 고깔소고 | 소고잽이 6~8인 | 고깔 6~12인 | ||
채상 | 채상소고 | 채상 4~6인 | 채상소고 7~14인 | ||||
열두발 | 12발상모 | 12발상모 | 12발 상모 | ||||
잡색 | 대포수 | 대포수 | 대포수 | 대포수 | 대포수/화동포수 | 대포수 | 대포수 |
중 | 중 | ||||||
조리중 | 조리중 | 조리중 | 조리중 | 조리중 | 조리중 | 조리중 | |
창부 | 창부 | 창부 |
좌창부 우창부 |
창부 | 창부 | ||
양반 | 양반광대 | 양반 | 양반 | 양반 | 양반 | 양반 | |
사대부 | 할미 | 한량 | |||||
할미 | 할미광대 | 할미 | 할미 | ||||
각시 | 각시광대 | 각시 | 각시 | 각시 | 각시 | 각시2인 | |
무동 | 무동2인 | 무동2인 | 무동2인 | 무동1인 | 무동2인 | 무동2인 | |
농구 | 농구 | ||||||
화동 | 화동 |
지금까지의 기록과 실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호남농악은 ‘축원농악’, ‘노작농악’, ‘오락·연예농악’, ‘걸립농악’ 외에, 싸움굿 형태의 ‘군사농악’까지, 양식적 유형이 복합적으로 발견된다. 축원 목적의 농악 양식은 공동 세시 행사로 치르는 《대보름굿》, 《마당밟이》/《지신밟기》가 있다. 노작 목적에 수반되는 농악 양식은 《두레풍장》/《두레굿》, 《호미씻이굿》이 있다. 호남농악의 문화적 원형은 좌도와 우도 구분없이 바로 축원과 노작의 공동 결사체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타깝게도 축원과 공동 노동에 뿌리를 둔 농악 공연양식은 우도 지역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두레 해체와 농촌사회 쇠락이 전개된 1960년대 이후로는 좌도 지역에서도 자연 연행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오락ㆍ연예 목적의 농악 양식은 《판굿》이 있다. 본래 《판굿》은 모든 농악 공연양식의 마지막 절차에 반드시 구성되어서 단합과 오락 목적의 기능적 역할을 담당했다. 사회 변동과 함께 농악이 문화양식의 하나가 아닌 공연예술로 받아들이는 인식과 짧고 집약적인 공연 수요가 많아지면서 판굿이 별도로 분화, 확대된 경향 또한 두드러지게 되었다. 호남농악 문화권에서는 직업적인 농악단과 마을 농악단 둘 다 걸립농악을 연행했지만 그 목적과 배경에 있어서 양자 간 차이가 뚜렷하다. 직업적인 농악단의 걸립은 생계 목적성이 우선하고, 반면에 마을 농악단의 걸립 연행은 공공 기금 마련과 지역 사회 화합이란 공동성을 띤다. 20세기 중반까지 호남 지방에서 창성한 전문 연예농악은 바로 걸립형태의 농악이 시대의 변동을 수용하면서 전문화된 변이로 볼 수 있다. 걸립형태의 농악은 시간적으로도 변모가 뚜렷하게 포착된다. 20세기 초~중반 사이에 활동한 전문 연예농악 단체들의 걸립농악은 마을 농악단과 마찬가지로 《마당밟이》/《지신밟기》와 《두레풍장》, 연예 《판굿》을 두루 연행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농악경연대회, 여성농악단 활약, 산업화 등의 복합적 요인과 맞물려 판굿 공연양식 위주로만 연행하는 형세가 짙어지면서 다른 공연양식들은 빠르게 사장(死藏)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외 싸움굿 즉, 군사농악의 형태는 《우도농악》의 《문굿》, 《좌도농악》의 《도둑잽이굿》에 그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호남농악은 전통사회로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대사회로의 이행 과정마다 발생한 한국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 온 전통 공연예술이다. 《우도농악》은 1900년대 초반부터 ‘범 우도’ 지역성을 띠며 예술 요소에 집중한 공연양식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좌도농악》은 농악 본연의 사회문화적 기능과 의미를 비교적 오래 계승하는 속에서 시대적 변천을 반영하였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호남농악은 근대 이전 시대 자족적 공연 목적의 마을굿 모습이 지속적으로 계승되는 한편으로, 공급과 소비의 예술산업적 구조 하에 ‘소비자의 경향’에 능동적으로 반응한 공연작품 형식의 연예농악의 모습까지 다양한 농악 양식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은 본디 ‘호남’이라는 넓은 범주에서의 지역적 보편성을 찾을 수 있는 매우 유사한 공연 문화와 양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농악이 문화적 공연에서 점점 분리되기 시작한 시점에 두 지역 간의 보편성에 조금씩 균열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연예성과 전문성을 강조한 전승집단과,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중심으로 한 사회문화적 기능을 우선시하는 전승집단으로 대비되는 두 갈래의 전승 과정을 거쳐, 현재의 무형문화재의 제도적 전승 환경 속에서 지역 문화 상징으로 고착되고 있다. 가장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 농악의 현재적 연행 국면과 같은 궤에서 호남농악 역시 이전의 목적과 성격이 다양했던 농악 양식들이 실제 연행에서 멀어지며 서서히 도태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축원농악과 노작농악은 일부 무형유산 전승 단체의 재현 행사를 통해 간신히 현전되고 있고, 대부분은 기억 전승에 의존하고 있거나 그마저도 세대교체와 함께 빠르게 잊혀지고 있다. 그 결과 과거 호남농악 문화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문굿》’, ‘《마당밟이굿》’, ‘《당산굿》’, ‘《샘굿》’, ‘《두레굿》’ 등의 연행은 빠르게 도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리농악: 국가무형문화재(1985) 임실필봉농악: 국가무형문화재(1988) 구례잔수농악: 국가무형문화재(2010) 남원농악: 국가무형문화재(2019) 광산농악: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1992) 화순한천농악: 전라남도 무형문화재(1979) 우도농악: 전라남도 무형문화재(1987) 부안농악: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1987) 김제농악: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1996) 정읍농악: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1996) 고창농악: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2000) 곡성죽동농악: 전라남도 무형문화재(2002) 익산성당포구농악: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2019) 진안 중평농악: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2020) 호남여성농악-포장걸립-: 전라남도 무형문화재(2022) 농악: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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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옥경(梁玉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