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악(男樂), 가무동(歌舞童), 화동(花童), 금의화동(錦衣花童)
무동은 ‘춤추는 아이’라는 일반적 의미 외에도, 제도와 연행을 통해 전승된 공연자 유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궁중에서 무동은 조선 세종대(1418~1450)에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사회기강을 반영해 외연(外宴)에서 여악 대신 남자아이로 하여금 정재(呈才)를 공연하게 하면서 제도화 되었다. 1433년(세종 15) 정월 군신(君臣) 간의 회례연에서부터 무동이 동원되었고, 무동이란 호칭은 1431년(세종 13) 8월에 이들이 입을 관복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처음 등장했다. 민간의 무동은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사당패·걸립패 등 유랑 예인 집단의 세습적 구조 속에서 연행에 참여한 어린이들과 그들의 공연을 지칭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〇 신분과 선발 기준
궁중 무동은 대개 궁중에 소속된 하층 계급이나 하급 악공의 자녀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춤과 노래에 재능을 보이는 소년으로, 궁중 악사나 무용 담당자의 지도 아래 정재(呈才)를 익히며 활동했다. 무동의 적정 연령은 대개 10세 전후였는데, 15세를 넘으면 성인 남성의 골격과 음성으로 변해 청아한 목소리와 고운 몸짓을 유지하기 어려워 활동이 제한되었다. 실제로 세종대에는 이러한 연령 문제로 무동 제도가 일시 폐지되었다가 문종 즉위 후 다시 회복되었으며, 이후에도 연령 기준은 무동 선발과 활동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민간 무동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농악대의 잡색(雜色) 역할로 포함되었거나 전문 연희패의 세습 구조 속에서 선발되어 연행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의 무동은 어른의 어깨 위에 올라 춤을 추거나, 삼층무동처럼 탑을 쌓는 묘기를 펼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들 역시 체구가 작고 유연한 10세 전후, 사춘기 이전의 연령대가 선호되었으며, 나이보다는 신체 조건과 연행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〇 역할과 활동
궁중 무동은 국가 제도 아래서 왕조의 이념을 실현하고 연향의 격식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본적으로 왕과 신하, 외국 사신이 참석하는 외연에서 여악을 대체하여 정재를 연행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효명세자 시기에는 여기(女妓)와의 접촉으로 인한 구설을 피하기 위해 일부 내연에서도 정재를 공연한 예가 있다. 무동은 궁중 내 행사뿐만 아니라 왕이 공신이나 고위 관료에게 음악을 하사하는 사악에 악공과 함께 파견되기도 했다. 특히 과거 급제자를 위한 삼일유가 행렬에 황의(黃衣)와 홍상(紅裳) 같은 특별한 복식으로 참여하여 축하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이때의 무동 모습은 평생도 등의 도상에서 확인된다. 그 밖에 단적인 예이긴 하나, 조선 후기 실록 기사에는 무동들이 춤 외에 노래나 악기 연주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민간 무동은 전문 연희 집단이 농악이나 판굿을 할 때, 어른(어미 무동)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춤과 재주를 부리는 '뜬쇠'나 '동기(童妓)' 역할을 맡았다. 이 곡예적인 연행은 판의 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가장 극적인 부분이었으며, 화려한 복색과 앳된 몸짓이 관람자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농악대나 걸립패가 마을에 들어서거나 행진할 때 선두에 서서 먼저 주목을 받는 역할을 했다. 무동들의 연희는 무동춤, 무동놀이라고 하며, 이 중 여러 무동들이 2층 또는 3층으로 탑을 쌓듯이 겹쳐 올라서서 춤이나 묘기를 부리는 고난도의 '삼층무동' 등의 종목도 있다. 때로는 무동들만으로 구성된 '무동패'가 독립적인 공연 집단을 이루어 마을 잔치, 장터 등에서 전문적인 기예 공연을 펼쳤는데, 《하재일기》에 경기 지역의 무동패 놀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〇 역사적 변천
궁중 무동 제도는 인조반정 이후 사림(士林)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외연 여악 배제 명분론이 확고해져 비로소 완전히 정착되고 활성화되었다. 이 시기 궁중 무동은 서울뿐 아니라 지방의 중국 사신 접대 연회까지 활동 영역을 확대했다. 특히 순조대 효명세자의 주도로 창작 정재가 대거 제작되면서 무동의 레퍼토리는 〈포구락〉, 〈가인전목단〉 등 현전하는 많은 종목으로 폭발적으로 넓혀졌다. 궁중 무동 제도는 국권 상실과 함께 사라졌으나, 1923년 순종 황제의 오순 탄신 진연에서 이왕직 아악부양성소 학생들이 무동으로 무대에 오르며 잠시 명맥을 잇기도 했다. 한편, 민간 무동의 변천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미미하지만, 20세기 전반기 문집과 신문 기사를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된다. 민간 무동이 선보였던 곡예적인 연행과 역할은 현재까지도 농악대의 잡색 역할이나 연희 종목을 통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