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抛毬), 구락(毬樂), 포락(抛樂), 포보원(抱寶夗)
무용수들이 좌·우로 편을 나누어 포구문(抛毬門)의 구멍에 채구(彩毬)를 던지며 즐기는 놀이 형식의 당악정재.
고려시대에 송나라로부터 유입된 당악정재이다. 포구문을 가운데 놓고 무용수들이 좌대와 우대로 편을 나누어 춤추며 차례로 나아가 공을 던진다. 공이 구멍[풍류안(風流眼)]에 들어가면 상으로 꽃을 받고, 실패하면 얼굴에 먹점을 찍는[점묵(點墨)] 유희적 형식의 춤이다. 궁중의 태평성대와 풍요, 길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희무이다.
포구락은 중국 당나라에서 하던 궁중 공놀이가 송대를 거쳐 고려로 전래된 것이다. 『고려사』 권71에는 1073년(문종 27) 팔관회에서 교방 여제자 초영 등 13인이 새로 전습한 포구락(抛毬樂)을 왕 앞에서 연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순조무자진작의궤』(1829)에는 “송나라 때 여자대무 가운데 포구락대가 있었는데, 고려시대 단오절에 이를 행하였고, 우리 조정의 연례에도 이것을 모방하여 사용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〇 개요
‘공을 던지며 즐기는 춤’이라는 뜻의 포구락은 예악 사상과 유희미가 결합한 정재이다. 궁중 연향에서 왕의 장수와 태평을 기원하고, 무용수의 아름다움과 풍류의 흥취를 노래한다.
〇 절차와 구성 포구락의 무용수 구성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고려시대에는 죽간자(竹竿子) 2명과 협무(挾舞) 12명, 조선 초기에는 협무는 16명이었고, 조선 후기에는 협무가 4~12명까지 다양하게 편성되었다. 1795년(정조 19)과 1902년(광무 6)의 진연에서는 쌍포구락(雙抛毬樂) 형태로 추어졌다. 또한 후기 의궤의 도식(圖式)에는 상벌의 절차를 담당하는 봉화(奉花, 상을 주는 자)와 봉필(奉筆, 벌을 주는 자)의 존재가 확인된다.
도입부에는 무용수들과 죽간자가 입장하고, 죽간자가 나아가 구호하고 좌·우로 나누어 선다. 진행부에서는 전대(全隊)가 나와 춤추는데, 시대별로 차이를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화병 앞에서 꽃을 꺾는 형상의 춤을 추고 「동천경색사(洞天景色詞)」를 부르며 회무(回舞; 원으로 둥글게 돌며 춤추는 대형)를 이루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절차가 생략되고 좌·우 대무(對舞) 형식으로 단순화되었다. 이어 무용수들이 차례대로 나와 노래를 부르고 무퇴‧무진하며 포구희를 하며 공을 던진다. 공이 포구문에 들어가면 절을 하고 서방색(書房色)이 나와 상포(常布)나 꽃을 준다. 반대로 실패하면 악사가 붓으로 오른쪽 볼에 묵점(墨點)을 찍는다. 만약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다시 잡으면 농구무(弄毬舞)를 추며 다시 던진다. 세 번째까지 실패하면 그대로 묵점을 찍는다. 상벌이 끝나면 다음 대가 같은 절차로 이어 춤춘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좌대(左隊)와 우대(右隊)가 번갈아 나와 각각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전대(前代) 두 사람이 함께 나와 노래와 춤을 추었다. 종결부에는 포구희가 모두 끝나면 죽간자가 나아가 구호하고 협무도 마무리 춤을 추고 물러난다. 이처럼 포구락은 시대에 따라 인원과 형식이 변했지만, 놀이와 의례가 결합된 상벌 구조와 경기적 긴장감, 그리고 유희적 요소가 어우러진 정재의 본질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〇 창사 세종은 『세종실록』에서 “포구락은 잡기이며 곡절이 너무 길다”고 했다. 실제로 여러 대(隊)가 창사를 부른다. 고려시대 창사에는 놀이 장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조선시대 창사에는 왕의 만수(萬壽)를 찬양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죽간자 구호] 雅樂鏗鏘於麗景 妓童部列於香階 아악갱장어려경 기동부열어향계 爭呈綽約之姿 共獻蹁躚之舞 쟁정작약지자 공헌편선지무 冀容入隊 以樂以娛 기용입대 이락이오 우아한 악이 아름다운 경치 속에 청아하게 울리는데 동기들이 향기 풍기는 층계에 떼지어 늘어서서 다투어 아리따운 자태를 드러내어 너울거리는 춤을 함께 드리고자 하오니 너그러운 도량 베푸사 무대에 등장을 허락하여 기쁘게 즐겁게 누리시길 바라옵니다 [일대 창사] 寶爭瓊瓊曲 羯鼓花奴腔 보쟁경경곡 갈고화노강 永新歌宛轉 蠻舞一雙雙 영신가완전 만무일쌍쌍 보쟁의 청아한 곡조 갈고는 화노강을 치네 영신의 노래에 맞춰 돌아드는 자태 짝지어 만무를 춤추네 [이대 창사] 翡翠簾前抛繡毬 窄羅衫子緊裹頭 비취염전포수과 착나삼자긴과두 玉纖高指紅絲網 嬴取筵前第一籌 옥섬고지홍사망 영취연전제일주 비취 주렴 앞으로 채구(彩毬)를 던지러 지나는데 좁은 소매 비단옷 단단히 동여맨 머리 섬섬옥수로 붉은 그물망 가리키며 연석(筵席)에서 첫 승리를 따내려 하네 [삼대 창사] 粉面嬌嬈列兩行 歌聲十二遏雲祥 분면교요열양행 가성십이알운상 笑回星眼傾簪玳 不覺花枝墜舞場 소회성안경잠대 불각화지추무장 아름답고 요염하게 화장한 미녀들 두 줄로 늘어서서 열두명이 노래 부르니 구름도 멈추고 듣네 별빛 눈동자에 웃음 띠고 비녀 꽂은 머리 기울이니 춤추는 자리에 꽃가지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는구나 [사대 창사] 簫鼓聲聲苦莫崔 彩毬高下且俳徊 소고성성고막최 채구고하차배회 輕抛正透紅門過 共獻君王萬壽杯 경포정투홍문과 공헌군왕만수배 퉁소와 북소리 심하게 재촉하지 말아다오 채구 던지는 높이를 가름하는 중이란오 살며시 던져 홍문을 정확히 지나갔으니 다 같이 군왕께 장수를 기원하는 술을 올리세 [오대 창사] 五花心裏看抛毬 香腮紅嫩柳烟稠 오화심리간포구 향시홍눈류연조 淸歌疊鼓連催促 這回不讓第三籌 청가첩고연최촉 저회불양제삼주 오색 꽃 속에서 포구놀이 구경하니 향기로운 뺨 붉은 어린 잎 하늘거리는 여인들이 가득하네 맑은 노래와 잦은 북소리 연달아 재촉하니 이번의 세 번째 시도는 양보하지 않으리라 [육대 창사] 聞道抛毬喜更忙 走臨鸞鑑畧勻粧 문도포구희갱망 주림난감약균장 輕招羣隊伴紅袖 只有微心管舊香 경초군대반홍수 지유미심관구향 포구놀이 한다는 말 듣고 기뻐 어쩔 줄 몰라 거울 앞에 달려가 대충 단장을 끝냈네 여러 동료들 얼른 불러 붉은 소매와 짝을 지으니 옛 향기 간직하고픈 속마음이 있어서라오 [죽간자 구호] 七般妙舞* 已呈飛燕之奇 칠반묘무 이정비연지기 數曲淸歌 且冀貫珠之美 수곡청가 차희관주지미 五音齊送 六律上催 오음제송 육률상최 再拜階前 相將好去 재배계전 상장호거 칠반무(七盤舞, 7개의 쟁반을 놓고 그것을 밟거나 주위를 돌며 추는 춤) 묘한 춤은 조비연(飛燕)의 기이한 재주를 보였고 몇 곡 맑은 노래도 구슬을 꿴 듯한 아름다워 즐거웠습니다. 오음(五音)이 일제히 전송하는 듯하고 육률(六律)이 서로 재촉하는 듯하니 섬돌 앞에서 두 번 절하고 함께 어울려 떠나렵니다.
- 원문출처: 『정재무도』(1893) <포구락>
| 고려사악지 | 악학궤범 | 정재무도홀기 | |||
| 죽간자 | 구호 | 구호 | |||
| 협무 | 전대(全隊) | 삼대사(三臺詞)동천경색사 (洞天景色詞) 양행화규사(兩行花竅詞) | 절화삼대사(折花三臺詞)소포구락사(小抛毬樂詞) | X | 전대(全隊)의 창사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략되거나 간소화됨. |
| 매대(每隊) | 좌ㆍ우대 각각 창사(12회) | 좌ㆍ우대 각각 창사(16회) | 좌ㆍ우대 차례대로 나와 동일한 창사(6회) |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에는 매 대 좌ㆍ우대가 각각의 창사를 불렀는데 조선후기에는 매대 동일한 창사를 불러 창사의 수가 반으로 생략됨. | |
| 전대(全隊) | 창사 | X | X | ||
| 죽간자 | 구호 | 구호 | |||
〇 춤사위 포구락은 공 던지기 놀이가 핵심이다. 무용수들이 차례로 공을 던지고 상벌 절차를 거치며, 절화무(折花舞), 사수무(四手舞), 농구무(弄具無), 협수무(挾手舞) 등의 춤사위가 어우러진다. 이러한 상·벌 구조와 놀이적 동작미는 활달하고 익살스러운 궁중 유희의 정서를 표현한다. 또한 공 던지기 전후의 동작미를 더했다. 특히 농구무는 공을 던지기 전 예비동작으로 놀이적 활력을 상징한다. 〇 반주 음악 고려시대에는 〈절화령(折花令)〉·〈수룡음령(水龍吟令)〉·〈소포구락령(小抛毬樂令)〉·〈청평악령(淸平樂令)〉이 사용되었고,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향당교주〉로만을 연주하였다. 현재 반주음악은 삼현육각의 편성으로 〈도드리〉·〈자진도드리〉·〈타령〉·〈자진타령〉등이 연주된다. 〇 복식ㆍ의물ㆍ무구 고려의 복식은 검정색 삼(衫)을 입었다. 조선 전기에는 기본 여기 복식과 무동 복식을 착용하였다. 조선 전기 『악학궤범』 권2의 ’정전예연여기악공배립(正殿禮宴女妓樂工排立)‘에 기록된 여기 복식은 단장하고 수화‧칠보잠‧금차를 머리에 꽂고, 백말군(白襪裙)·보로(甫老)·홍대(紅帶)를 두르고 단혜아(段鞋兒)를 신었다. 무동은 부용관(芙蓉冠)을 쓰고 흑색선을 두른 백주중단(白紬中單)을 입고 황‧녹‧자‧남‧도홍의 오색단의를 입었다. 흑색 선을 두른 홍색 치마를 입고 두석녹정대(豆錫綠鞓帶)와 화아흑단화(花兒黑短靴)를 착용하였다. 조선 후기 무동은 아광모(砑光帽)·홍라포(紅羅袍)‧백질남선중단의(白質藍縇中單衣)‧남질흑선상(藍質黑縇裳)·학정대(鶴頂帶)·흑화(黑靴)·한삼을 착용하였다. 여기는 화관(花冠)·초록단의(草綠丹衣)·황초단삼(黃綃單衫)과 안에는 남색치마와 겉은 홍색치마를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와 오색한삼과 초록혜(草綠鞋)를 착용하였다. 현재는 조선후기기 여기복식인 황초단삼을 입는다. 의물의 경우 조선 전기 『악학궤범』에는 좌·우에 인인장·용선‧봉선‧작선·미선과 각 의물 사이에 정절을 배치하여 좌·우로 18명이 배열하고, 무용수의 뒤쪽에 개(蓋)를 든 여령 4명이 서서 모두 22명의 의물을 배치하였지만, 『고려사』 「악지」나 조선 후기 『정재무도홀기』에는 의물의 기록이 없다. 무구는 포구문이 사용되었다. 나무로 제작되며, 용‧봉‧구름‧선녀 등의 무늬를 새기고 초록과 붉은 비단으로 휘장을 만들어 두른다. 공(채구)는 나무를 깎아 만들어 붉은 칠을 하고 비단 술로 장식한다.
〇 역사적 변천 포구락은 고려시대에 유입된 후 조선 후기에는 향악화·토착화 과정을 거쳤다. 궁중뿐 아니라 전국 교방에서 주요 레퍼토리로 향유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 국연(國宴)에서 빠지지 않고 추어졌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포구락은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이 『정재무도홀기』를 바탕으로 무대에 맞게 재구성한 형태로, 경기적 요소와 현장 즉흥성을 가미하여 대중의 공감을 얻는 작품으로 발전하였다.
포구락은 유입 경로와 역사적 계보가 명확한 현존 정재로, 놀이와 춤이 결합된 독창적 형식을 지닌다. 악(樂)·가(歌)·무(舞)·연희(演戱)가 조화를 이루는 종합예술로서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군신 간 화합과 왕권의 위상을 드러내며, 단순한 오락을 넘어 의례적·정치적 의미를 내포한다. 시대에 따라 재구성·전승되어온 포구락은 예술성과 유희성을 겸비한 전통예술의 문화사적 가치가 크다.
국립국악원 편, 『시용무보·정재무도홀기』, 전통음악연구회, 198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이혜구 역주, 『신역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이의강 책임번역,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장사훈, 『한국전통무용연구』, 일지사, 1977. 김영희 외, 『한국춤통사』, 보고사, 2014. 손선숙, 『한국궁중무용사』, 보고사, 2017. 이흥구 손경순, 『한국궁중무용총서』, 보고사, 2009. 배인교, 「조선후기 교방 관속 음악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07.
최경자(崔慶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