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자타령(왈자打令), 게우사, 계우사(戒友辭/戒友詞)
유흥과 방탕을 일삼던 왈자 무숙(武叔)과 그를 개과천선시키고자 하였던 기생 의양의 일을 노래한 실창(失唱) 판소리 작품
《무숙이타령》은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한 작품이었으나 19세기 후반 이후 점차 창을 잃고 전승이 단절되었다. 중고제 명창으로 분류되는 김정근이 《무숙이타령》을 잘 불렀다고 하며, 20세기 이후 복원이 시도되기도 했다. 《무숙이타령》의 사설 정착본으로서의 필사본 『게우사』 2종이 발굴됨에 따라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수한 판소리 명창들의 이름과 장기를 기록한 선유(船遊) 놀음 장면은 판소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다.
《무숙이타령》의 형성에 관한 내용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판소리 사설의 정착본에 해당하는 박순호 소장 필사본 『게우사』가 남아있어 그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가사 「계우사(戒友詞)」와의 관계가 주목되기도 했는데, 가사 「계우사」가 전형적인 기생과 아내 형상, 돈을 탕진한 무숙이의 반성 등이 단선적인 구조로 나열한 작품인 데 반해, 「게우사」는 탕아 무숙이의 문제를 판소리 향유층의 중층적 욕망과 연결하고 기생 의양을 주체적인 인물로 부각함으로써 서사의 확대와 주제의 심화를 가져온 작품으로 인정되는 점을 고려할 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로부터 기존의 판소리 《무숙이타령》이 가사 「계우사」의 성과를 수용하며 소설화된 작품이 『게우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무숙이타령》에 앞서보다 단순한 형태로 존재했던 《왈자타령》류에 삶의 균형성 및 건강성을 문제삼는 가사 「계우사」류의 교훈성이 더해져 판소리 《무숙이타령》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 편찬 정보 1991년 김종철에 의해 월촌문헌연구소의 『박순호 소장 한글 필사본 고소설 자료총서』 제1권에 수록된 박순호 소장 필사본 『게우사』가 판소리 《무숙이타령》의 판소리 사설 정착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필사본의 크기는 16㎝×25.7㎝이며, 일부 낙장(落張)이 존재해 그 전모를 알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필사 시기는 ‘경인(庚寅) 윤이월(閏二月)’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때의 경인년은 1890년으로 추정된다. 물론 《무숙이타령》은 송만재가 1843년에 지은 「관우희」에 거론되었으므로, 창작 연대는 그보다 훨씬 앞선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2016년 노재명에 의해 파손된 부분 없이 온전한 『게우사』 필사본이 발굴되어 작품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노재명은 2020년 『잊혀진 판소리 무숙이타령을 찾아서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무숙이타령 필사본 영인ㆍ해제』를 통해,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게우사』를 일반에 공개하였다. 이 필사본의 크기는 19㎝×29.3㎝이며, 전체 70쪽 가운데 《무숙이타령》이 62쪽 분량을 차지한다. 필사 연도는 경인년으로 박순호 소장 필사본 『게우사』와 같다. 그 외에 『장편가집(長篇歌集)』, 『상사별곡(相思別曲)』, 『고대본 악부(樂府)』에 각기 수록된 장편가사 〈계우사(戒友詞)〉 3종도 판소리 《무숙이타령》의 관련 문헌으로 주목할 만하다. ○ 역사적 변천 판소리 《무숙이타령》의 존재가 확인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록은 송만재(宋晩載, 1788~1851)의 「관우희(觀優戱)」 중 “장안의 한량으로 왈자패들은(遊俠長安號曰者), 붉은 옷에 초립 쓴 우림 패거리(茜衣草笠羽林兒). 동원에서 술 마시며 놀이판 벌일 때(當歌對酒東園裏), 뉘라서 의랑을 차지해 여주에 비할까(誰把宜娘示獲驪).”의 시구이다. 여기서 송만재는 이 작품명을 《왈자타령》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른 바탕소리에 관한 시와 비교해, 이 시는 다소 단편적이고 단순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장안의 왈자들이 벌인 놀이판에서 과연 누가 의양을 차지할 것인가가 관심사가 되는 상황만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송만재가 이 시를 남겼을 당시의 《왈자타령》은 내용이 매우 간략한 형성 단계의 판소리였고 이것이 《무숙이타령》으로 다듬어져 정립되었다고 보는 시각, 송만재가 「관우희」를 지을 당시 《무숙이타령》은 이미 전승 약화 및 탈락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한편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은 『조선창극사』에서 이 작품의 명칭을 ‘무숙이타령’이라고 명시하는 한편, 《무숙이타령》을 잘 불렀던 명창으로 김정근(金定根, 1830년대 전후?~?)을 거론했다. 이로부터, 《무숙이타령》이 19세기 중후반 무렵까지는 판소리로 연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94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수록』에서 《무숙이타령》의 왈자 김무숙과 의양의 사랑을 거론한 부분도 주목을 요한다. 한편, 김정근이 중고제 창자에 속했던 점을 고려하면, 《무숙이타령》도 중고제 판소리의 전승의 소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창을 잃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박동진 명창에 의해 《무숙이타령》의 복원이 시도되었는데, 이를 완창했다는 실제 기록은 없다. 1970년대는 《무숙이타령》 사설 정착본으로서의 『게우사』 필사본이 보고되기 이전이므로, 복원에 참고할 자료가 부족해 계획 단계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2016년 충남도청 문예회관에서 열린 ‘제1회 중고제 충청소리제’에서 노재명의 주도로 《무숙이타령》 복원 공연이 이루어진 바 있다. ○ 구성 및 세부 내용 《무숙이타령》은 장안 갑부로 명성이 자자했던 왈자 김무숙이 평양 기생 의양을 첩으로 들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의양은 나름의 뜻을 품고 김무숙과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나, 무숙은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지속하였고 이에 의양은 그를 개과천선시키기로 한다. 의양은 무숙의 처에게 이러한 의도를 미리 알린 다음, 막덕이 등과 공모하여 무숙으로 하여금 갖은 고난을 겪게 한다. 친구 김철갑과 의양에게 속아 절망한 무숙이 죽기를 결심하자 의양은 그제야 사실을 말하고, 무숙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 판소리 음악사적으로 주목할 부분은 “우춘대의 화초타령, 서덕염의 풍월성, 최석황의 내포제, 권오성의 원담소리, 하언담의 옥당소리, 손등명의 짓거리, 방덕희의 우레목통, 김한득의 너울가지, 김성옥의 진양조, 고수관의 아니리, 조관국의 한거성, 조포옥의 고등세목, 권삼득의 중모리, 황해청의 자웅성, 임만엽의 새소리, 모흥갑의 아귀성, 김제철의 기화요초, 신만엽의 목재주, 주덕기의 갖은소리, 송항록의 중항성, 송계학의 옥규성”이라는 『게우사』의 선유 놀음 장면이다. 판소리사 초기의 상황 및 판소리 연행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판소리 연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판소리 《무숙이타령》은 해당 서사가 판소리 외에 고소설, 가사로도 유통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판소리 작품의 전승 과정과 달리 독특한 지점이 발견된다. 이는 《장끼타령》과 유사한 특징이기도 하다. 비록 19세기 후반 이후 창을 잃고 판소리로서는 지속해서 전승되지 못하였으나, 그 사설 정착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필사본 『게우사』가 발굴되어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필사본 『게우사』는 판소리 연행을 염두에 둔 기록이나 사설이 부기되어 있어 단순한 독서물로서의 소설본과는 다르다. 한편 중고제 명창 김정근이 《무숙이타령》의 명창이었다는 사실도 판소리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이다.
김기형 역주, 『적벽가ㆍ강릉매화타령ㆍ배비장전ㆍ무숙이타령ㆍ옹고집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5. 김종철, 『판소리의 정서와 미학』, 역사비평사, 1996. 노재명, 『잊혀진 판소리 무숙이타령을 찾아서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무숙이타령 필사본 영인ㆍ해제』, 한국문화재재단, 2020. 김종철, 「자료소개 : 게우사」, 『한국학보』 17, 일지사, 1991. 김혜영, 「『소수록』 연구」, 조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노재명, 「판소리 무숙이타령 자료 연구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필사본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3. 최원오, 「〈무숙이타령〉의 형성에 대한 고찰」, 『판소리연구』 5, 1994.
송미경(宋美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