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무는 1707년(숙종 32), 숙종의 재위 30년을 축하하는 진연 기록인 『숙종실록』 권44에 처음 나타난다. 당시 인정전(仁政殿) 외진연에서 구작행례(九爵行禮)의 세 번째 잔을 올릴 때, 당악곡 <오운개서조곡>에 맞추어 무동이 첫 번째 정재로 초무를 연행했다.
○ 개요
초무는 창사가 없어 춤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초(初, 시작·처음)'라는 명칭과 실록 및 의궤 기록에서 연향 행례의 첫 번째 정재로 일관되게 설행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서무(序舞)로서 연향의 시작을 알리는 개념으로 연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서무로서의 성격은 춤이 짧고 간결하며 창사가 없다는 특징으로 뒷받침된다.
○ 절차와 구성
초무는 향악정재의 보편적인 형식을 따르며, 도입부-전개부-종결부의 짧은 구성을 명확하게 지닌다. 춤의 변화는 집박 악사의 박(拍)을 신호로 이루어지며, 두 무원(舞員)이 일렬대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도입부는 두 무원(舞員)이 초입 대형인 일렬대형(一列隊形)을 구성하여 시작한다. 이들은 대오(隊伍)를 따라 연향의 주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무진(舞進)하며 춤을 시작한다. 전개부는 무원들이 춤의 주요 동작을 대칭적으로 반복한다. 북소리에 따라 한 무원은 왼손은 소매를 들고 오른손은 소매를 내리는 동작(좌수거수 우수낙수이무)을 취하고, 다른 무원은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리는 동작(우수거수 좌수낙수이무)을 취하며 춤춘다. 종결부에서 대오 전체는 무퇴(舞退)를 진행하며 춤을 마친다. 두 무원은 춤이 끝날 때까지 일렬대형을 그대로 유지한다.

○ 연행적 특징
초무의 춤사위는 간결함과 대칭적 균형을 특징으로 한다. 『정재무도홀기』에는 무진, 무퇴 등 이동 동작과 함께 거수(擧袖, 소매를 듦)와 낙수(落袖, 소매를 내림)가 기록되어 있다. 두 무원은 서로 대조를 이루는 팔 동작을 취함으로써 정재도에 표현된 것처럼 대칭적 균형을 이룬다.
○ 반주 음악
초무의 반주 음악은 연행 시기마다 아명(雅名)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1707년 기록에는 당악곡 〈오운개서조곡〉, 이후 『정재무도홀기』에는 〈풍운경회지악(風雲慶會之樂)〉 또는 〈천하태평지곡(天下泰平之曲)〉으로 전하나, 이 곡들은 모두 〈보허자령〉의 아명으로 보인다. 초무는 본래 창사가 없어, 반주 음악은 춤동작의 진행과 장단만을 제공한다.
○ 복식·의물·무구
초무의 복식은 순조 『(기축)진찬의궤』에 무동 복식도가 전해진다. 무동은 머리에 부용관(芙蓉冠)을 쓰고, 백질흑선중단의, 남선상 위에 녹색단령(綠色團領)을 착용한다. 허리에는 두석록정대(豆錫綠鞓帶)를 띠고 화화흑화(黑靴)를 신는다. 초무는 창사나 복잡한 대형 변화가 없어 별도의 의물이나 무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 역사적 변천 및 전승
초무는 1707년(숙종 32)에 기록에 처음 등장한 이래 숙종과 영조 대에 궁중 연향의 서무로 정착하였다. 1714년(숙종 40) 숭정전 갑오 외진연에서 제3작에 무동의 첫 정재로 연행되었으며, 1719년(숙종 45) 기로신들을 위한 외진연에서는 5작 행례의 제1작에 무동이 춤을 추었는데, 선행 기록으로 미루어 이 역시 초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같은 해 『(기해)진연의궤(進宴儀軌)』의 내전 진연 기록에서도 초무가 칠작행례의 제3작에 정재 종목 중 첫 번째로 공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첫 정재’로서의 연행은 1744년(영조 24) 『(갑자)진연의궤(進宴儀軌)』에서도 구작행례의 제3작에 계승되었다. 이처럼 초무는 숙종 대에 창제된 이후 영조 대까지 궁중 연향의 서무(序舞)로서 그 역할을 확고히 하며 전승되었다.
『정재무도홀기』에 여령(女伶)과 무동(舞童)정재 기록이 모두 남아있어 연행 주체가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반 연행이 단절된 후, 현대에 『정재무도홀기』를 토대로 김천흥의 재현 안무로 복원되었으며, 1982년 국립국악원 무대에서 여령정재로 초연된 이래 전승되고 있다.
김기화(金起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