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태 및 구조
조선전기 부용관은 종이와 베로 만든 관과 영락, 끈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은 연꽃 모양이고, 영락은 구슬로 꾸몄으며, 끈에는 도다익(都多益)을 박았다. 다만 회례연에 쓰는 것에는 자주색의 끈을 달았고, 공연에 쓰는 것에는 분홍색의 끈을 달았다. 두 부용관은 장식을 가하는 방식은 비슷하나 관의 형태가 다르다. 조선후기 『(무자)진작의궤』(1828)의 부용관도 『악학궤범』의 것과 비교해 거의 변화 없이 형태가 유사하다.
○ 재료 및 제작 방법
『악학궤범』에는 부용관은 배접한 종이로 만들고 옻칠한 베로 안을 대었으며 겉은 금ㆍ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색으로 색칠하고 연꽃을 그려 넣었다. 좌우에는 채색한 구슬로 꾸민 영락과, 도다익을 박은 끈을 단다고 했다.
조선후기 『(무자)진작의궤』(1828)에는 부용화관의 수공화가 20건, 90량 1전 1분이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전에는 부용관을 장식하는 꽃을 종이로 만들었는데 이 때에는 비단 등으로 꽃을 만들어 화려하게 꾸몄다고 한다.
『(기축)진찬의궤』(1829)에 부용관의 제작 필요 물폼 목록이 기록되어있어 재료, 분량, 가격 등을 상세 하게 알 수 있다. 기축년 당시 부용관은 22건이 제작 되었는데 한 개 당 가격이 4전(錢)으로 나와 있다. 비녀에 사용되는 주석용두, 오색구슬, 채화, 금박 등 다양한 소재가 사용되어 실제 부용관의 모습은 화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축년의 무동 복식은 색상만 더 화려해 졌을 뿐 무자년의 무동복식과 형태와 구성은 거의 같았다. 그러나 도식에 표현된 부용관의 모습은 많이 다른데 제작에 소용된 재료들로 보아 형태는 같았으며 표현상의 이유로 단순하게 그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 역사적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13년(1431) 8월 박연이 회례에 사용하기 위한 남악(男樂)과 관복(冠服)으로 당나라때 경운지무(景雲之舞)에서 착용했던 녹운관(綠雲冠)ㆍ화금포(花錦袍)와, 성수지무(聖壽之舞)와 해홍지무(解紅之舞)에서 착용했던 금동관(金銅冠)ㆍ화봉관(花鳳冠)ㆍ오색화의(五色畫衣)ㆍ자비수유(紫緋繡襦)와, 용지지무(龍池之舞)에서 착용했던 부용관(芙蓉冠)ㆍ오색운의(五色雲衣) 등의 무용복과 고려때 부터 전해진 기존의 무용복의 모습을 그려 올렸는데 이 중 경운지무(景雲之舞)와 용지지무(龍池之舞) 등이 무복으로 결정되었고 세종 13년(1431) 9월에 회례연에 사용할 녹운관(綠雲冠)과 부용관(芙蓉冠)을 각각 스물다섯 개씩 만들라는 기록과 세종 15년(1433) 2월의 부용관 열다섯 개와 녹운관 열다섯 개를 더 만들었다는 기록 등으로 부용관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9년(1447)에 무동은 기예에 익숙해 질 때가 되면 바로 장정이 되어 무동 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동을 없애고 각 연회에 무동 대신 악공을 쓰게 하였으며 이때 부용관을 태워 없앴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박연(朴堧, 1378~1458)의 건의로 문종 즉위년(1450)에 다시 무동 제도가 부활 하면서 다시 부용관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부터 잔치의 성격에 따라 회례연(會禮宴)때 쓰는 부용관과 공연(公宴)때 쓰는 부용관의 두 종류로 나누어 만들었다. 『악학궤범』에 두 부용관의 도식이 실려 있다. 조선후기에는 회례연이 개최되지 않았으므로, 회례연용 부용관은 없어졌고, 특정 정재에 사용되었고, 『(무자)진작의궤』(1828) 소재 부용관의 형태는 조선전기 공연용 부용관과 같다.
박민재(朴民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