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준이 1937년에 설립하여 1941년까지 활동한 조선 고전무용 전문 교육・공연 기관.
1930년대는 창극, 연극, 영화, 악극, 양악 등 공연예술이 다채로워지고, 신무용과 서양에서 유입된 무도와 레뷰 등 새로운 춤 문화에 대중의 이목이 주목된 시기였다. 반면, 예로부터 전해져온 조선 고유의 춤 무대는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목도한 한성준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조선춤의 보급과 근대 무대에 걸맞은 무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설립과 운영은 한성준이 그간 몸담았던 경성구파배우조합, 조선정악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 등 예술 단체에서의 활동, 고수 및 무용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근간이 되었다.
○ 설립 목적 및 주요 구성원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설립 목적은 소멸되어가는 조선의 무용과 음악을 연구, 발굴, 복원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이를 보급, 전승, 부흥, 대중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권번의 활동과 별개로, 민간에서 일반인들에게 조선의 고전무용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작품화하여 공연하는 독보적인 단체를 지향한 것이었다. 주요 구성원은 1937년 12월 28일 창립총회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발기인으로는 명고수이자 조선 고전무용의 대가였던 한성준을 비롯하여 김석구, 김덕진, 이강선, 장홍심 등이 참여했다. 초대 임원으로는 회장 나종철, 부회장 현철, 이사장 김석구가 선정되었다. 당시 회원은 총 31명이었으며, 여기에는 한성준이 무용 교수자로 활동했던 조선성악연구회 회원들과 최승희의 손위 남자 형제인 최승일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해외 공연으로 창립총회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최승희는 창립 준비금으로 600원을 기부하여 단체 조직에 힘을 보탰다.

○ 조직체계와 소재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창립 초기 음악부, 무용부, 가극부, 출판부로 조직 체계를 마련하고, 연구생 교육, 발표회 개최, 연구회보 발행 등의 활동을 계획했다. 운영 방식은 연구회에 입소한 연구생에게 도제식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조선무용과 음악 학습, 졸업시험, 공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조선 고전무용의 맥을 잇는 전문 무용가를 양성했다. 연구회의 소재지는 경운정 47번지(현 종로구 경운동 교동초등학교 건너편)로, 이곳에 2층 한옥집을 연구회관으로 신축하여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이 건물은 1층을 한성준의 주거와 연구생들의 숙소로, 2층을 연습실로 사용했다.
○ 교육 과정 및 내용
오전에는 취미로 춤을 배우러 다니는 일반인 수업, 오후에는 연구생을 대상으로 한 전문인 수업이 진행되었다. 취미반은 〈즉흥무〉와 기본춤을 배웠고, 연구생들은 〈승무〉를 춤의 바탕으로 삼아 2~3년간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한성준은 개인별 지도와 반복 훈련을 통한 원리의 터득을 중요시했다. 그가 먼저 〈승무〉를 선보인 후 연구생들의 연습이 이어졌고, 〈승무〉가 완성되어야만 비로소 다른 춤을 전수해 주었다. 한성준 외에 경기도 출신 예인 이동안, 김광채가 춤을 가르쳤다. 매년 6월경 한성준 생일을 겸해 졸업시험을 시행하였고, 시험과목은 〈승무〉와 〈즉흥무〉였다. 특히 〈즉흥무〉를 통해 전문무용수로서의 개성과 창의력의 발휘를 살폈다. 시험에 통과한 연구생들은 한성준의 다른 춤인 〈검무〉, 〈학춤〉, 〈한량무〉, 〈태평무〉 등을 익힐 자격을 부여받았고, 단체의 공연에 출연하였다.
○ 주요 활동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주요 활동은 교육과 공연이었다. 교육은 오전에 취미로 춤을 배우러 다니는 일반인 수업과 오후에 연구생을 대상으로 한 전문인 수업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취미반은 〈즉흥무〉와 기본춤을 배웠고, 연구생들은 〈승무〉를 춤의 바탕으로 삼아 2~3년간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한성준은 개인별 지도와 반복 훈련을 통한 원리의 터득을 중요시했으며, 그가 먼저 〈승무〉를 선보인 후 연구생들의 연습이 이어졌고, 〈승무〉가 완성되어야만 비로소 다른 춤을 전수해 주었다. 한성준 외에 경기도 출신 예인 이동안, 김광채가 춤을 가르쳤다. 매년 6월경 한성준 생일을 겸해 졸업시험을 시행하였고, 시험과목은 〈승무〉와 〈즉흥무〉였다. 특히 〈즉흥무〉를 통해 전문무용수로서의 개성과 창의력의 발휘를 살폈다. 시험에 통과한 연구생들은 한성준의 다른 춤인 〈검무〉, 〈학춤〉, 〈한량무〉, 〈태평무〉 등을 익힐 자격을 부여받았고, 단체의 공연에 출연하였다.
공연 활동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4년간 전개되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연도별 공연의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1938년 5월 2일 첫 공연이 부민관에서 열렸다. 전조선향토연예대회 ‘고전무용대회’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 회원 전원인 삼십여 명이 출연하였고, 6월 23일 조선일보사의 기념 사업 일환으로 부민관에서 열린 ‘고전무용대회’에 회원들이 모두 출연하였다. 같은 해, 8월 31일부터 9월 10일까지 ‘조선고전음악무용대회’ 서선순업 공연을 열어 황해도 해주, 신주, 사리원, 진남포, 평양, 연안, 개성 지역을 순회하였고, 9월 17일부터 10월 7일까지 함경도 함흥, 청진, 회령, 북청, 신포, 원산 등지를 순회하며 북선순업 공연을 이어갔다. 이듬해, 남선순업 공연을 열어 2월 21일부터 3월 20일까지 30일간 충청도 대전부터 공주까지 일대를 순회하였다. 1940년 2월 27일 일본공연 추진을 기념하는 ‘도동기념공연’이 조선일보사의 후원으로 부민관에서 열렸고, “조선 고전무용의 호화판”으로 각광받았다. 7월 동경 히비야 공회당을 비롯하여, 대판, 경도, 명고옥 등 일본 순회공연에 한성준을 비롯한 삼십여 명의 남녀 회원들이 참여하였고, 30일 동경 와세다연극박물관에서 열린 ‘조선무악감상회’에서 조선 고전음악과 무용을 공연하였다. 같은 해 10월 중순에 열린 북선만주순업 공연은 원산, 연길, 목단강, 하얼빈 등 조선 동포들이 이주한 만주 일대에서 진행된 공연으로 한성준과 회원 삼십여 명이 참여했다. 공연 활동의 마지막 해인 1941년, 1월 23일부터 26일까지 4일간 ‘조선음악무용의 밤’ 공연이 우미관에서 개최되었다. 지난해 일본과 만주 순회공연으로 단체의 기량이 한층 쌓인 무대로, 한성준을 비롯한 삼십여 명의 단원이 출연하였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공연은 첫해부터 객석이 만원이 되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고전무용을 본 관객들은 춤에 담긴 찬란한 옛 정취에 빠져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 역사적 변천
1930년대는 창극, 연극, 영화, 악극, 양악 등 공연예술이 다채로워지고, 신무용과 서양에서 유입된 무도와 레뷰 등 새로운 춤 문화에 대중의 이목이 주목된 시기였다. 반면, 예로부터 전해져온 조선 고유의 춤 무대는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목도한 한성준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조선춤의 보급과 근대 무대에 걸맞은 무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설립과 운영은 한성준이 그간 몸담았던 경성구파배우조합, 조선정악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 등 예술 단체에서의 활동, 고수 및 무용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근간이 되었다.
이정민(李姃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