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성이 1922년 가을부터 1930년까지 이왕직아악부에서 학습한 정재 10편의 창사와 무보, 그리고 1930년대 말의 조선권번 정재 2편을 기록한 자필 무보.
저자 이병성이 1931년에 작성한 10편 정재와 그 외 다른 내용의 기록들을 섞어 엮은 필사본 책자이다. 1922년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제2기생으로 입소하여 배운 정재 10편과 하규일에게 학습한 10편 정재의 창사가 펜글씨로 정리되어 있으며, ‘이왕직’과 ‘조선권번’ 판심 인쇄가 있는 세로 줄칸 노트에 정재 3편도 포함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의 무동정재 연행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창사집이자 무보로서 의의가 있다.
이 책은 이병성(李炳星, 1909~1960)이 1930년 7월에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 내외의 근친(覲親: 어버이를 뵘) 만찬연(晩餐宴)에서 연행된 정재 10편의 창사(唱詞)와 무의(舞儀)를 자필 기록하고, 1931년 3월에 엮은 것이다. 이 시기는 이병성이 아악수보 및 아악수장 재직 전후로 작성한 것으로, 1931년부터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의 아악생들을 위한 정재 교육 교재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체재 및 규격
1책 100면 50장(앞‧뒤 표지 포함) 네 가지 용지를 한 권으로 엮은 기록물 1. 조선권번 판심 용지: 25cm×17cm (세로칸 길이 19.2 × 가로 11칸) 2. 무지 용지: 25cm×19cm 3. 이왕직 판심 용지1: 25×17.7cm (세로칸 길이 22.5 × 가로 13칸) 4. 이왕직 판심 용지2: 25.5cm×17cm (세로칸 길이 20.5 × 가로 10칸) 이병성의 『창사와 정재철』에는 네 가지의 다른 용지가 사용되었다. 처음과 끝에 ‘조선권번’ 판심 용지가 9장 있고, 이왕직 판심 용지가 10장이 있다. 핵심 내용인 1930년 만찬연 정재 10편의 창사와 무의는 무지 용지 27장에 펜글씨로 쓰였다. 이왕직 판심의 공책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세로줄 13칸짜리는 6장, 10칸짜리는 4장이 있다. 그리고 앞 표제 2장, 빈면 1장과 뒤표지가 1장으로 총 50장이 묶인 책자이다. 서로 다른 내용의 용지 네 가지를 후대에 합본한 기록 자료이다.
○ 소장자 및 소장경위
개인 소장. 이흥구(李興九, 1940년생, 국가무형유산 학연화대합설무 보유자) 소장. 현 소장장가 1985년경 이병성의 장남 이동규(국가무형유산 남창가곡 보유자)에게서 받은 낱장 자료를 한데 묶어 현재의 『창사와 정재철』이 되었다.
○ 편찬연대
이 기록물의 편찬연대는 복합적이다. 1차 작성 시기는 앞표지 및 속지 표제에 ‘'昭和六年三月(소화 6년 3월)이라고 적혀있어, 1931년 3월에 정재 10편 무보 등의 핵심 내용이 이병성에 의해 처음 정리,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 원문에 '李丙星(이병성)'이라고 표기된 것은 ’炳‘의 오류이다. 이후 이병성이 이왕직아악부를 퇴직하여 조선권번에 재직하던 때인 1940년(소화 15년)에 조선권번 판심 용지 등에 <선유락>, <고구려무> 등을 추가로 기록하였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기에 작성된 것을 소장자 이흥구가 1985년 무렵 한 권으로 묶은 위 『창사와 정재철』이 되었다.
○ 편저자 사항
이병성(李炳星)은 1922년 이왕직아악부 아악부원양성소에 제2기생으로 입소하여, 그해 가을 무동으로 선발되었다. 〈가인전목단〉, 〈장생보연지무〉 등 정재 8종목을 학습하고 1923년에 순종 탄신 경축연회에서 처음 공연하였다. 1926년 양성소를 졸업한 후 아악수보로 임명되었고 , 1927년경 아악수로 임명되었으며, 1930년 7월 영친왕(英親王) 이은 내외의 근친 만찬연에서 아악수로서 〈처용무〉를 춤추었다. 이 공연의 창사와 무보[무의]를 기록하여 1931년 3월에 이 책자를 작성했으며, 1932년에 아악수장(雅樂手長)이 되었고, 1938년에는 아악사(雅樂師)로 승진했다. 1939년에 아악부를 사퇴하고 조선권번으로 이직하였으며 , 재직 중 권번 정재의 무의를 기록하여 이 책자에 추가로 남겼다.
○ 내용 및 구성
이병성의 『창사와 정재철』의 구성 및 내용을 표로써 정리하여 제시한다.
〈표 1〉 이병성의 『창사와 정재철』 구성표
용지 |
구분 |
구성 내용 |
면/100면 |
장/50장 |
|---|---|---|---|---|
앞표지 |
겉 표지 |
소화 6년(1931) 3월 이병성 |
1-2면 |
2장 |
속 표제 |
창사와 정재철 1931.3/ LBS |
3-4면 |
||
조선권번 |
파손지 |
소화 15년 8월 26일/ 두봉(斗峯) |
5-6면 |
5장 |
공연자명단 |
9월 19일 조선박람회 정재무 거연자명 |
7면 |
||
공연 종목 |
제1일 19일(목)~제4일 22일(일) |
8면 |
||
무의 |
선유락(船遊樂) |
9-12면 |
||
빈면 |
- |
13-14면 |
||
이왕직13칸 |
정재목차 |
처용무(處容舞)~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
15면 |
1장 |
창사 실기 |
여러 정재무 창사 자구와 어법 |
16면 |
||
무지 |
창사 |
처용무(처용가서), 춘앵전, 봉래의 |
17-20면 |
5장 |
장생보연지무, 무고, 향령무, 가인전목단 |
20-22면 |
|||
수연장, 보상무, 만수무 |
22-25면 |
|||
빈면 |
- |
26면 |
||
무도/무의 |
처용무 |
27-31면 |
22장 |
|
빈면 |
무산향 창사(세로줄칸 종이 붙임) |
32면 |
||
향령무 |
33-34면 |
|||
무고 |
35-38면 |
|||
보상무 |
38-41면 |
|||
무도/무의 |
춘앵전 |
41-44면 |
||
가인전목단 |
44-48면 |
|||
수연장 |
48-53 |
|||
만수무 |
53-56면 |
|||
봉래의 |
57-62면 |
|||
장생보연지무 |
36-70면 |
|||
이왕직13칸 |
무의 |
장생보연지무(2) |
71-73면 |
4장 |
빈면 |
- |
74면 |
||
창사/해제 |
차용가{의해(意解)/주해(註解)} |
75-77면 |
||
빈면 |
- |
78면 |
||
표제 |
정재의(呈才儀) 「무산향/소화 14년(1939)1월 |
79면 |
=4장 |
|
빈면 |
- |
80면 |
||
무의 |
무산향 |
81-83면 |
||
빈면 |
- |
84-86면 |
||
이왕직13칸 |
창사 |
봉래의 무가(舞歌) |
87면 |
1장 |
향령 창사 치사 |
88면 |
|||
조선권번 |
무의 |
선유락(추정) |
89면 |
|
빈면 |
- |
90면 |
4장 |
|
고구려무 |
91-95면 |
|||
빈면 |
- |
96면 |
||
뒤표지 |
빈면 |
- |
97-98면 |
2장 |
겉표지 |
99-100면 |
이병성의 『창사와 정재철』은 정재 10종을 무지 용지에 차례로 기록한 후에 『呈才(정재)』라는 표지 제목과 연월, 작자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했다. 5쪽에 해당하는 찢긴 지면에는 ‘昭和十五年八月卄六日 斗峯(소화 15년(1940) 8월 26일 두봉)’이 있다. 이 5쪽부터 14쪽까지의 용지 판심에는‘株式會社 朝鮮券番(주식회사 조선권번)’이 인쇄되어 있다. 그중 7쪽에는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출연자 명단과 9월 19일(목)~22일(일)의 오전과 오후에 공연한 춤 종목의 이름들이 표기되었다. 이병성은 이왕직아악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조선권번에서도 가곡 교사를 겸직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조선권번’의 용지를 사용한 기록물이 책자의 앞과 뒤에 합본 될 수 있는 자료로 남겨졌을 것이다. 한편, 이왕직 표기의 판심 용지에는 〈장생보연지무〉의 무의가 재차 기록되었다. 그다음에는 〈처용가〉의 의해(意解)와 주해(註解)를 덧붙였다. 그리고 ‘소화 14년(1939)년 1월’의 표기와 함께 ‘정재의 「무산향」’이 덧붙여졌다. 또 그다음에는 〈봉래의〉와 〈향령〉의 무가(舞歌), 즉 창사를 또 한 번 붙였다. 그리고 그 다음의 ‘조선권번’ 판심이 있는 용지에는 4인이 연행하는 〈고구려무〉가 최종 추가되어 있다.
○ 정재 목차
處容舞(처용무) 響鈴舞(향령무) 舞鼓(무고) 寶相舞(보상무) 春鶯轉*(춘앵전) 佳人剪牧丹(가인전목단) 壽延長(수연장) 萬壽舞(만수무) 鳳來儀(봉래의) 長生寶宴之舞(장생보연지무) * 춘앵전의 한자는 ‘春鶯囀’인데, ‘轉(구를 전)’으로 표기되었다. ‘囀(지저귈 전)’이 쓰여야 한다.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