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발무의 유래에 대해서 조선 후기 의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당(唐)나라 궁중 연회악[연악(燕樂)]의 한 종류인 법곡(法曲)에 〈동발상화(銅鈸相和)〉라는 악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이것을 본떠 사용했다는 것이다. 향발무는 조선 전기 세종대에 악(樂)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1449년(세종 31) 10월 3일에 향발 정재는 항상 연습해야하는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 연행적 특징향발무의 가장 핵심적인 춤사위는 향발을 치는 동작[擊鈸]이다. 향발을 칠 때에는 세 차례씩 연달아 쳤으며, 먼저 바깥 손의 향발을 치고 안쪽 손의 향발을 치는 순서였다. 향발무의 특징적인 동작으로 팔을 비스듬히 아래로 펴고 무용수들이 서로의 손을 교차하여 끼는[신비상협수(伸臂相挾手)] 춤사위가 있다. 『(계사)정재무도홀기』에도 팔을 비스듬히 끼는 ‘신비(伸臂)’ 동작이 있으나, 현대적으로 재구성된 향발무에서는 손을 교차하여 끼는 동작이 생략되기도 한다.

○ 반주 음악조선 전기 『악학궤범』에서 향발무의 반주 음악은 〈보허자령(步虛子令)〉이었다. 향악 정재인데도 당악곡이 쓰인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 후기 의궤에서 향발무의 반주 음악은 〈보허자령〉ㆍ〈여민락령〉ㆍ〈향당교주〉였으며, 고종대 『정재무도홀기』에서는 〈향당 교주〉가 반주 음악이었다. 1993년에 편찬된 국립국악원의 『궁중무용무보』에 따르면, 무대화된 향발무는 〈도드리〉와 〈타령〉에 맞추어 춤추었다.
○ 복식ㆍ의물ㆍ무구조선 전기 향발무 기녀의 복식은 큰 잔치에서는 붉은 옷[단장(丹粧)]을 입고 여러 장식[잡식(雜飾)]을 했으며, 소규모 잔치에서는 흑장삼에 남저고리를 입었다. 조선 후기 『(기축)진찬의궤』(1829) 「공령」에 따르면, 향발무 여령은 화관을 쓰고 초록단의(草綠丹衣)와 황초단삼(黃綃單衫)을 입고, 안에는 남색상(藍色裳), 밖에는 홍초상(紅綃裳)을 덧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鏤繡帶)에 오색한삼을 끼고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무동은 복두(幞頭)를 쓰고, 남포(藍袍)ㆍ백색바탕에 흑색으로 선을 두른 중단의(中單衣)ㆍ홍야대(紅也帶)ㆍ흑화(黑靴)를 착용했다. 향발무에서 향발은 일종의 악기이자 춤 도구이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향발은 놋쇠로 만들며 모양은 동발(銅鈸)과 같지만 크기가 작으며, 향발의 지름은 2치 1푼(약 3.3cm)이다. 향발의 뒤에 사슴 가죽 끈을 달고, 향발 아래에 오색 매듭을 드리운다.
○ 역사적 변천 및 전승성종대 『악학궤범』의 시용향악정재(時用鄕樂呈才)에 향발이 수록되었으며, 1505년(연산군 11) 11월 20일에는 연산군이 향발 100쌍을 급히 궁중으로 들이라는 명을 내릴 정도로 인기리에 공연되었다. 조선 후기 숙종 대 이후로 군신 간의 잔치인 외연에서는 무동이, 왕실 여성과 친인척 잔치인 내연에서는 기녀가 정재를 담당했는데, 무동이 주요하게 추었던 종목에 향발무가 포함되었다.


사신연의 잔치에서도 향발무가 공연되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 권4에 따르면,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여 맞이하는 잔치에서 무동은 붉은 의상을 입고, 보허자악(步虛子樂)에 맞추어 향발무를 춤추었는데, 그 모습을 『봉사도(奉使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이후에는 1960년 국립국악원 제48회 국악감상회에서 KBS 여성 국악 연수생들이 발표하였다. 1973년 7~8월에는 아동무용연구회에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이 향발무를 안무하여 지도했고, 1980년 국립국악원 ‘전통무용발표회’에서 향발무가 재현 공연되었다. 이후 무대화된 향발무가 현재까지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
조경아(趙京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