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죽(戱竹), 집장(執杖)
고려와 조선 시대의 당악정재(唐樂呈才) 연행 시 무원 인도의 소임을 수행하는 춤 도구.
죽간자는 당악정재를 연행할 때 사용하는 춤 도구[舞具] 중 하나이다. 대나무 장대 끝에 세죽 100쪽을 묶어 붉은색 칠과 금박, 수정구슬로 장식하고, 두 대가 한 쌍으로 사용된다. 봉죽간자가 양손으로 장대를 잡고 무원을 인도하며 구호를 했다.
죽간자는 고려 문종(文宗) 27년(1073) 11월 팔관회에서 교방(敎坊) 여제자 초영(楚英)이 전래한 〈포구락(抛毬樂)〉과 함께 무구로 수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악지」에는 당악정재인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포구락〉, 〈연화대(蓮花臺)〉 연행 시, 죽간자가 활용되었다. 송대 맹원로의 『동경몽화록』(1126)에는 참군색이 죽간을 잡고 구호를 염송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죽간자의 형태와 기능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죽간자는 고려에서 당악정재와 함께 수용되어 정재 무원의 등장·퇴장과 구호를 담당하는 인도(引導)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
① 구조와 형태
무구인 죽간자의 주재료는 대나무이다. 『악학궤범』 당악정재 의물 도설에 따르면, 대나무 자루[柄]의 원통 지름은 1치[寸]이고, 목두부터 하단까지의 길이는 7자[尺] 7치이다. 목두는 등조각[片籘]으로 감아 매고, 하단은 납물을 들인[鑞染] 쇠로 장식한다[鐵粧]. 목두 위에 가는 대나무[細竹] 100개를 삽입하여 붉은칠[朱漆]을 하고 붉은실[紅絲]로 그것을 묶는다. 이것의 길이는 구슬로부터 목두까지 2자 8치이다. 그리고 모든 세죽 끝 1치에 금박지(金箔紙)를 입히고, 수정구슬을 꿴다고 하였다. 죽간자는 2개가 한 쌍이다.
죽간자를 잡는 방법에 대한 기록은 『악학궤범』이나 『정재무도홀기』에서 찾을 수 없다.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는 나란히 선 2인의 죽간자가 자신의 앞에 놓인 긴 장대를 바깥쪽 손으로 가슴 부위 위치에서 잡고, 두 사람의 안쪽 손으로 배꼽 정도의 위치를 잡는다. 따라서 마주보고[相對] 서 있을 때는 무대 객석 쪽에서 보이는 손이 장대의 위쪽을 잡은 모습이 된다.
| 시용 당악정재명 | 등장 음악 | 퇴장 음악 | 비고 |
|---|---|---|---|
| 헌선도(獻仙桃) | 회팔선인자(會八仙引子) | 천년만세인자(千年萬歲引子) |
고려로부터 계승한 조선 당악정재 ※(고ㆍ악)은 『고려사ㆍ악지』 |
| 수연장(壽延長) | 연대청인자(宴大淸引子) | 중강령(中腔令) | |
| 오양선(五羊仙) | 오운개서조인자(五雲開瑞朝引子) | 오운개서조인자 | |
| 포구락(抛毬樂) | 절화삼대(折花三臺) (고‧악) 절화령(折花令) |
수룡음인쇄(水龍吟引殺) (고‧악) 오운개서조인자 |
|
| 연화대(蓮花臺) | 전인자(前引子) (고‧악) 오운개서조인자 |
후인자(後引子) (고‧악) 오운개서조인자 |
|
| 금척(金尺) | 오운개서조인자 | 오운개서조인자 |
조선 전기에 창제한 당악정재 |
| 수보록(受寶籙) | 회팔선인자 | 회팔선인자 | |
| 근천정(覲天庭) | 오운개서조인자 | 오운개서조인자 | |
| 수명명(受明命) | 회팔선인자 | 회팔선인자 | |
| 하황은(荷皇恩) | 회팔선인자 | 회팔선인자 | |
| 하성명(賀聖明) | 천년만세인자 | 천년만세인자 | |
| 성택(聖澤) | 천년만세인자 | 천년만세인자 | |
| 육화대(六花隊) | 천년만세인자 | 천년만세인자 | 조선 전기에 등장한 당악정재 |
| 곡파(曲破) | 회팔선인자 | 회팔선인자 |
○ 죽간자의 기능과 역할 죽간자는 정재 연행 시 진구호(進口號)와 퇴구호(退口號)를 통해 연행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구호의 내용은 주로 정재의 창작 배경과 춤의 찬미를 담고 있으며, 봉죽간자는 이 구호를 통해 무원의 대열 이동과 절차를 통제하고 인도한다. ○ 죽간자의 무도(舞圖) 위치 조선 후기 『정재무도홀기』에 의하면, 봉죽간자의 연행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구호를 마친 뒤 물러나는지(退立), 서로 마주 보고 서는지(小退相對而舞), 혹은 물러나지 않는지에 따라 구분되며, 춤 종목에 따라 위치 변화에 차이가 있다.
〇역사적 변천 죽간자의 역사적 변천은 무구의 형태변화와 봉죽간자의 무도 위치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무구 죽간자의 형태는 조선 전기 『악학궤범』의 도설과 조선 후기 진연·진찬 의궤의 도식(圖式) 에 차아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악학궤범』 기록에는 대나무 자루의 매듭이 선명하고, 세죽이 구부려져 묶였으며 수술이 짧게 달린 모습이다.이와 달리 조선 후기의 각종 의궤도설에는 죽간자의 자루가 매끈하고 세죽의 끝이 하늘을 향해 뻗은 모습으로, 목두와 세죽 접합 부분에 수술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특징적이다. 특히 헌종 무신년(1848) 의궤의 도식은 이후 고종 임인년(1902) 진연의궤까지 그 형태가 동일하게 전승되었다. 봉죽간자 2인의 무도(舞圖) 위치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봉죽간자가 진구호를 마친 뒤 무용수들 뒤쪽의 좌우 양편에 나뉘어 서 있다가, 퇴장 시 다시 앞으로 나와 무용수를 인도했으마, 조선 후기 『정재무도홀기』에는 구호를 마친 후 ‘족도하면서 물러나 선다’[足蹈而退立]고 되어 있다.
죽간자에 꿴 수정구슬은 봉황(鳳凰)이 먹는다는 귀한 열매인 죽실(竹實)을 상징한다. 이는 성덕(盛德)으로 태평성대를 다스리는 임금에게 봉황이 나타난다는 전설과 연결된다. 따라서 죽간자는 단순한 춤 도구가 아니라,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성왕의 덕행을 찬미하는 의례적 의미를 지닌다. 죽간자의 인도로 춤을 펼치는 행위는 잔치와 연행의 공간이 곧 태평성대의 구현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朴琮,『鐺洲集』 陳暘, 『樂書』 韓嬰,『韓詩外傳』 『高麗史』 「樂志」 『宋史』 「樂志」 『樂學軌範』 『進爵儀軌』(戊子) 『進饌儀軌』(戊申) 『進饌儀軌』(壬辰) 『進宴儀軌』(辛丑) 『進宴儀軌』(壬寅)
국립국악원 편, 『한국음악학자료총서3 -進爵儀軌(戊子)ㆍ進饌儀軌(己丑-)』, 전통음악연구회, 1981. 국립국악원 편, 『한국음악학자료총서4 -時用舞譜ㆍ呈才舞圖笏記-』, 전통음악연구회, 1981. 김영희 외, 『한국춤통사』, 보고사, 2014. 류둥성, 『그림으로 보는 중국음악사』, 민속원, 2010. 손선숙, 『궁중정재 용어사전』, 민속원, 2005. 중국예술연구원무도연구소 편, 『中國舞蹈詞典』, 북경: 문화예술출판사, 1994.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