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동(舞童)
광수무는 숙종(肅宗)대 연향에서 무동이 공연한 정재 기록에 나타나는 향악정재이다. 조선 후기 왕실에서 임금의 경사일에 신하들이 정성을 모아 축하드리는 잔치인 외진연(外進宴)이나, 노인을 우대하여 베푸는 기로연(耆老宴)에서 대개 어린 남자 무용수인 무동(舞童) 두 명이 외연(外宴)에서 추었던 춤으로, 소매를 이용해서 추는 동작이 특징적이다. 반주음악으로는 〈향당교주〉를 연주한다.
광수무는 숙종(肅宗)대부터 추어진 춤임을 문헌에서 볼 수 있다. 어린 남자 무용수인 무동이 공연하는 외연(外宴) 때에 추던 춤 중 하나이다. 외연은 임금과 신하가 모여 상하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공식적인 국가의 하례 및 위로의 잔치를 말하는데, 연향『의궤』와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후기 외연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순조 1828년 『(무자)진작의궤』 광수무 항목에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의 시에 ‘다시 살짝 손을 드리우고 넓은 소매〔광수(廣袖)〕로 홍진을 스치네’라고 하였다. 1711년 『패문운부(佩文韻府)』 이백(李白)의 시에 ‘너울너울 넓은 소매〔광수(廣袖)〕로 춤추니 흡사 해동에서 새가 날아오는 듯’이라고 하였다”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일부에서는 이 시들이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어서 광수무를 고구려의 춤으로 해석한 사례가 있다. 또한 1493년 성종 대의 『악학궤범(樂學軌範)』 권2에 여기 두 명이 추는 춤 이름으로 광수무(廣手舞)가 보이는데, 광수무(廣袖舞)와 같은 춤이라는 가능성은 있지만 확증은 불가하다.
○ 개요
광수무는 넓은 소매를 이용하여 추는 춤으로 구성 인원은 두 명이다. 광수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숙종 대부터 나타난다. 반주음악은 1719년 숙종 대는 <여민락령>으로, 1828년 순조 대는 <향당교주>, 고종 조에도 <향당교주>로 연주되었다. 광수무는 숙종 대부터 순조 대까지 외연, 즉 임금과 신하가 친목을 도모하는 공식적인 국가 하례 및 잔치에서 무동이 광수무를 공연하였다.
○ 절차와 구성
광수무는 무원 두 명이 나란히 서서 음악이 연주되면 두 사람이 앞으로 나오며 춤춘다, 북소리에 맞춰 왼팔을 들고 오른팔은 내리며 춤춘다. 음악이 나오면 반대로 오른팔을 들고 왼팔은 내리며 춤춘다. 서로 마주 보고 춤을 추다가 다시 무대 앞을 보고 춤을 추며 마무리 하는 단조로운 춤 구성이다.
장서각 소장 『무동각정재무도홀기(舞童各呈才舞圖笏記)』에는 두 팔을 번갈아 가며 대칭으로 올렸다 내리는 [좌수거수우수낙수이무(左手擧袖右手落袖而舞), 우수거수좌수낙수이무(右手擧袖左手落袖而舞)]가 주요 춤동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광수무는 소매(팔)를 이용해서 추는 춤이라고 볼 수 있다.
○ 연행적 특징
광수무는 숙종 대부터 궁중 연향의 외연에서 남자 무용수 무동에 의해서만 춤추어졌으며, 무보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작품이 다소 단순하며 짧은 것이 특징이다. 『정재무도홀기』기록에 따르면, <향당교주>음악에 춤 동작으로는 두 팔을 번갈아 가며 대칭으로 올렸다 내리는 동작으로, 소매(팔)를 이용해서 추는 춤이다.
○ 역사적 변천과정
광수무는 1706년(숙종) 인정전 진연 숙종 즉위 30년을 축하하는 연향과 1714년(숙종)인 숭정전 진연 숙종 즉위 40년을 축하하는 연향, 1719년(숙종) 경현당 진연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축하하기 위한 진연에서 무동 두 명이 광수무를 추었다.
1743년(영조)과 1744년(영조) 경덕궁(경희궁) 숭정전에서 열린 대전 진연에서 무동 두 명이 광수무를 추었다.
1828년(순조)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보령 40세 축하를 위한 연향과 1829년 순조의 생신 연향에도 광수무가 추어졌다. 또 1902년(광무) 4월 고종(高宗) 황제의 보령 51세가 되어 기로소 입소를 경축하는 외진연과 고종 황제의 통치 40년을 경축하는 외연에도 무동의 광수무가 연행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전승이 단절되었다가, 2003년 국립국악원 《원형탐구 시리즈》 〈숙종조 기로연〉에서 당시 안무자 하루미(하유미)가 광수무를 재현하여 무대에 올린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반주 음악 1719년(숙종 45) 『(기해)진연의궤』에 의하면 광수무의 반주 음악은 〈여민락령〉이다. 1828년(순조 28)에는 〈향당교주〉가 연주되었으며, 고종 조에도 『(임인)진연의궤』(1902)에 의하면 〈향당교주〉가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었다. 2003년 국립국악원 《원형탐구 시리즈》 〈숙종조 기로연〉 광수무에는 <세령산>·<도드리>·<타령>·<빠른타령>·<타령>으로 구성되어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었다. ○ 복식ㆍ의물ㆍ무구 광수무의 복식은 1828년 『(무자)진작의궤』에 의하면, 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線中單衣)백색바탕에 검정 선이 둘러 있는 포와 홍질남선상(紅質藍縇裳)홍색바탕에 남색선이 둘러 있는 치마, 녹단령(綠團領)깃을 둥글게 만든 녹색 포를 입고, 두석녹혁대(豆鍚綠革帶)장식이 달린 녹색 혁대를 허리에 띠고, 머리에는 부용관(芙蓉冠)연꽃모양으로 제작된 모자를 쓰고, 서화흑화자(書花黑靴子)검정 바탕에 꽃이 그려져 있는 신발을 신었다. 1829년 『(기축)진찬의궤』에 수록된 광수무의 무동 복식도 전반적으로는 동일한데, 화화방보(畵化方補)꽃 그림을 그린 네모의 흉배가 추가로 기록되었다.
광수무는 숙종대부터 추어진 향악정재로 임금의 경사일에 신하들이 정성을 모아 축하드리는 잔치인 외진연(外進宴)이나, 노인을 우대하여 베푸는 기로연(耆老宴)에서 어린 남자 무용수인 무동(舞童)이 향당교주 음악에 맞추어서 추는 향악정재이다. 외연(外宴) 때 남자 무용수 무동에 의해서만 춤추어졌다.
『악학궤범』의 〈하성명(賀聖明)〉 기록에 기녀 열두 명이 북향하여 ‘광수무(廣袖舞)’를 추도록 지시되어 있는데, 이 때의 ‘광수무’는 “〈연화대〉의 좌동녀의 춤과 같은데 다만 무릎을 꿇는 의식은 없다” 라고 하였다. 〈연화대〉에 동녀가 외수를 쳐드는[광수(廣袖)] 춤 동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광수무의 춤 양식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성명〉은 기녀 열두 명이 추었던 춤이므로, 무동이 추는 광수무와는 다르지만, 소매를 이용하여 춤춘다는 점에서는 관련성이 있다. 즉 조선 전기에 여기가 추던 광수무가 조선 후기 외연에서 무동이 추는 춤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2003년 광수무 재현 당시 의상은 다른 정재 의상과 동일한 것으로 착용했다. 이는 문헌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향후 고증 및 추가 복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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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金惠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