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를 창업한 선조의 공덕과 국운 번창을 기원하는 용비어천가를 노래하며 추는 춤
봉래의는 1445년(세종 27) 왕명으로 창제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부르며 〈여민락(與民樂)〉ㆍ〈치화평(致和平)〉ㆍ〈취풍형(醉豐亨)〉으로 구성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악ㆍ가ㆍ무 종합예술 작품이다. 세종대왕이 친히 창제한 봉래의는 하늘의 뜻으로 조선을 건국하기까지, 6대조(목조ㆍ익조ㆍ도조ㆍ환조ㆍ태조ㆍ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나라의 번창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봉래의는 조선 초 세종 때에 만들어진 궁중무용으로『악학궤범(樂學軌範)』(1493) 권5에 춤의 절차가 전한다. 조선 중기에는 1630년(인조 8)에 봉래의가 연행된 기록만 있을 뿐 전승이 단절되었다. 조선 후기인 1893년(고종 30) 『정재무도홀기』에 다시 봉래의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고종 대에 가장 많이 연행된 봉래의는 1901년(광무 5) 고종황제 탄신 50세를 경축하는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진연(進宴)에서 추어졌다. 이때의 봉래의는 모든 면에서 조선 초기보다 확연히 축소되고 변화된 모습이어서, 창제 당시의 역사적 의미와 웅장한 면모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이왕직아악부에서 추었던 〈무의(舞儀)〉 기록과 1931년 6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촬영된 《조선무악》 영상에서도 간소화된 형태가 확인된다.
1923년에 베풀어진 순종황제 탄신 50주년 경축연에서 봉래의 외 여덟 종의 궁중춤이 연행된 이후 1981년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에 의해 재현되었으며, 2007년에는 『악학궤범』의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한 <봉래의, 봉황이여 오라!> 가 무대 작품으로 공연된 바 있다.
○ 태조 이성계의 조선 왕조 개국과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는 시가(詩歌)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추는 춤이다. 봉래의를 구성하고 있는 〈여민락〉ㆍ〈치화평〉ㆍ〈취풍형〉에는백성과 함께 즐기고[여민락], 평화를 이룩하며[치화평], 풍요를 누린다[취풍형]는 세종대왕의 정치이념이 담겨있다. 또한 ‘봉래의’라는 제목은 성군의 덕치(德治)로 태평성대를 이루면 나타난다는 전설 속의 봉황(鳳凰)이 날아오기를 기원하는 세종의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구성
조선 초 창제 당시의 봉래의는 죽간자(竹竿子) 두 명, 무용수 여덟 명 외에 의물(儀物) 스물두 명, 악기를 연주하는 인무기(引舞妓) 열두 명 등 총 마흔네 명으로 구성된다.인무기는 월금ㆍ당비파ㆍ향비파ㆍ향피리ㆍ대금ㆍ장고를 연주하며 무용수 좌우로 늘어서고, 그 옆에 의물인 인인장ㆍ정절ㆍ용선ㆍ봉선ㆍ작선ㆍ미선이 도열하고 개(盖)는 무용수 뒤편에 위치한다. 춤의 시작과 끝에 죽간자가 구호(口號)를 하고, 무용수는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춤을 춘다.
춤의 절차는 대체로 무용수 여덟 명이 ①〈여민락〉 무도(舞圖): 남북 2열에서 북향하여 춤추다가 우측으로 회무(回舞: 돌면서 춤을 춤)하여 치화평 대형을 만든다. ②〈치화평〉무도: 동서남북 사방 대형을 만들어, 북쪽 두 명이 북향하여 춤추고 대무(對舞: 서로 마주보고 춤을 춤)ㆍ배무(背舞: 서로 등대고 춤을 춤)하다가 전체가 우측으로 회무하여 위치를 바꾸며 춤춘다. (네 번 반복) ③〈취풍형〉 무도: 동서 2열에서 역시 대무ㆍ배무ㆍ북향하여 춤추다가 회무한 후, 처음 여민락 대형으로 돌아가는 형식이다. 조선 후기에는 〈여민락〉ㆍ〈치화평〉ㆍ〈취풍형〉의 세 가지 기본 대형은 유지되었으나 전반적으로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으며 치화평에서 죽간자가 함께 회무하고 남북 두 대(隊)가 서로 교체하는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봉래의에서 춤을 추며 부르는 시가(詩歌) 용비어천가는 그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 전기 〈여민락〉에서는 용비어천가 125장 중에서 제1~10장을 전부 한문 가사로 노래하였으며, 〈치화평〉에서는 제1~16장 및 마지막 장인 제125장을 국ㆍ한문 혼용 가사로, 〈취풍형〉에는 제1~8장과 마지막 장을 역시 국ㆍ한문 혼용 가사로 불렀다. 그러나 단절 기간을 거친 후 조선 후기에는 창사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즉 〈치화평〉 창사가 완전히 생략되고 〈여민락〉 10장의 창사를 〈치화평〉과 각 5장(章)씩 나누어 불렀으며, 〈취풍형〉에서는 칠저장(漆沮章)이 빠지고 다른 4장이 더 추가되는 등 시대적 변화가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에서는 죽간자 구호 외에 총 여섯 장(章)만을 노래하는 것으로 대폭 축소되어 조선 초 창제 당시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그러나 제1장 해동장(海東章) 외에 근심장(根深章)ㆍ원원장(源遠章) 및 마지막 천세장(千世章)은 변함없이 전승되었다. 〈해동장〉 해동육룡비(海東六龍飛): 해동의 육룡이 날으시어 막비천소부(莫非天所扶):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동부(古聖同符) : 옛 성인의 일과 일치하시도다. 〈근심장〉 근심지목 풍역불올(根深之木風亦不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유작기화 유분기실(有炸其華 有蕡其實): 꽃 좋고 열매가 많으며, [죽간자 구호] 念我祖宗, 德盛功隆. 염아조종, 덕성공륭. 載篤其慶, 誕膺成命. 재독기경, 탄응성명. 於萬斯年, 赫赫昭宣. 오만사년, 혁혁소선. 永言嘆嗟, 惟以遂歌. 영언탄차, 유이수가. [죽간자 구호] 우리 조상님을 생각건대 덕은 성대하고 공은 높아 경사로운 일 도탑기도 하신지라 천명을 받으시어 아아! 만년토록 밝디 밝게 펼치시니, 길이 찬탄하다 마침내 노래를 부릅니다. 해동장(海東章) 海東六龍飛, 해동육룡비, 莫非天所扶. 막비천소부, 古聖同符. 고성동부. 해동장(海東章) 해동에 여섯 용이 나르시니 하늘이 돕지 않음이 없었고 옛 성인의 일과도 꼭 들어맞았네. 근심장(根深章) 根深之木, 風亦不扤. 근심지목, 풍역불올. 有灼其華, 有蕡其實. 유작기화, 유분기실. 근심장(根深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휘지 아니하니 꽃이 아름답고 열매도 많이 열리노라. 원원장(源遠章) 源遠之水, 旱亦不渴. 원원지수, 한역불갈. 流斯爲川, 于海必達. 유사위천, 우해필달. 원원장(源遠章) 샘이 깊은 물은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 흘러 냇물이 되고 반드시 바다에 이르노라. 천세장(千世章) 千世黙定漢水陽,. 천세묵정한수양 累仁開國, 卜年無疆. 누인개국, 복년무강. 천세장(千世章) 천세 전에 미리 정해 두신 한강 북쪽 땅에 어진 덕을 쌓으시고 나라를 여셨으니 앞으로 누릴 해가 끝이 없으리라. [죽간자 구호] 天高地厚, 盛德難名. 천고지후, 성덕난명. 形諸歌頌, 庶機象成. 형저가송, 서기상성. 簫管旣奏, 肅雍厥聲. 소관기주, 숙옹궐성. 萬姓歡心, 永賀昇平. 만성환심, 영하승평. [죽간자 구호]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워 가득한 덕을 이름하기 어려우나 노래로 표현하여 성공을 드러내고자 하나이다. 젓대를 부니☞관을 연주하니, 소리가 점잖고 조화로워 만백성이 기쁜 마음으로 길이 태평한 시대를 축하하나이다. - 원문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번역: 강명관
봉래의 반주음악도 시대 흐름에 따라 춤과 함께 변천되었다. 창제 당시인 15세기에는 〈전인자〉ㆍ〈여민락령〉ㆍ〈치화평 3기〉ㆍ〈취풍형〉ㆍ〈후인자〉등 다섯 곡으로 구성되었으며,『세종실록』권140~145에 악보가 전한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전인자〉ㆍ〈후인자〉가 없어지고 〈취풍형〉은 가곡의 〈농(弄)〉ㆍ〈계락〉ㆍ〈편(編)〉으로 연주되어 민간의 성악곡이 궁중 악무에 사용되었던 조선 후기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현대에는 대체로 〈보허자〉ㆍ〈향당교주(鄕唐交奏)〉ㆍ〈도드리〉ㆍ〈타령〉 등 으로 반주한다.
○복식
봉래의 복식은 별도의 기록이 없어 기본 복식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의 여기 복식은 연향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모든 예연(禮宴)에서 여기(염발기)는 단장(丹粧/단의)에 백말군(白襪裙)ㆍ보로(甫老/裳)를 입고 홍대(紅帶)를 두르며, 머리에 수화(首花)와 칠보잠(七寶簪)ㆍ금차(金釵)를 꽂고 단혜아(段鞋兒)를 신는다. 또 곡연(曲宴), 무과전시(武科殿試), 관사(觀射), 관나(觀儺), 사신동궁연 이하 각 연향, 주봉배(晝奉杯), 유관(遊觀), 사악(賜樂), 예조후대왜연(禮曹厚待倭宴)에서는, 여기가 흑장삼(黑長衫)ㆍ남저고리(藍赤古里)ㆍ백말군ㆍ홍대를 착용하고 머리에 칠보잠ㆍ금차를 꽂고 단혜아를 신는다. 이외에 예조왜야인연(禮曺倭野人宴)에서는 여기가 상복(常服)을 착용한다. 상세 내용은『악학궤범』권 2에, 복식도는 권9에 전한다.
조선 후기 여기의 기본 복식은 화관(花冠)을 쓰고 황초단삼(黃綃單衫)에, 속은 남색 치마 〔남색상(藍色裳)〕겉은 홍치마〔홍초상(紅綃裳)〕를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ㆍ오색한삼(五色汗衫)ㆍ초록혜(草綠鞋)를 착용한다. 1829년(순조, 기축년)에는 초록단의(草綠丹衣)가 추가되었다. 〈신축진연도병〉(1901)에 묘사된 봉래의는 기본 복식을 착용하고 있어 시기와 행사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의물ㆍ무구
봉래의는 향악정재에 속하지만 죽간자와 인인장 등의 의물이 등장하여 향ㆍ당악정재 혼합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인무기가 무용수들 양 옆에서 향ㆍ당악기로 반주하였다.
15세기 봉래의는『악학궤범』에 향악정재로 분류되어 있으나 음악적 면이나 춤의 구성면에서 향ㆍ당악이 혼합된 독특한 형식을 갖춘 작품이다. 죽간자 및 각종 의물의 등장과 죽간자 구호에 한문시(漢文詩)를 채택하는 등 당악정재 양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여민락〉은 한문 가사, 〈치화평〉과 〈취풍형〉은 국ㆍ한문 혼용 가사로 되어있다. 이외에도 여기가 비파ㆍ피리 등 향ㆍ당악기를 들고 직접 연주하는 인무기의 출현은 정재 종목 중에 봉래의가 유일하다.
『악학궤범』 『(신축) 진연의궤』 『(임인) 진연의궤』 『(신축) 진찬의궤』 『풍정도감의궤』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4집: 시용무보, 정재무도홀기』, 국립국악원, 1980.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20집: 세종, 세조실록 악보』, 국립국악원, 1986. 정신문화연구원,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김경희, 「〈鳳來儀〉의 역사적 변천과 의미」, 『한국음악연구』 29, 2001. 조규익, 「「鳳來儀」악장 연구(1) - 樂舞 명칭의 典據와 악장 내용의 상관성을 중심으 로」, 『온지논총』 31, 2012.
심숙경(沈淑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