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소리의 역사판소리는 17~18세기 중반까지 영산이나 잡가, 타령 등으로 불리던 단순한 수준에서 18세기 후반, 새로운 장단과 성음, 창법, 기교, 더늠의 개발을 통해 예술성을 획득하면서 전 계층의 호응을 얻었고, 명창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판소리 명창은 하한담(?~?)과 최선달(崔禮雲, 1726~1805)로부터 시작되어 권삼득(權三得, 1771~1841)대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이 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고수관(高壽寬, 1764~1849?) 명창도 기록에 등장하였는데, 고수관은 당대 문인이었던 신위(申偉)와 깊은 교유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권삼득의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이나 고수관의 ‘자진사랑가’ 등은 이들로부터 비롯된 가장 오래된 더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은 판소리가 예술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시기라 할 수 있다. 판소리는 이렇게 명창의 등장과 활약 그리고 양반들의 참여를 통해 지역을 넘어 점차 전국화 되었다. 그리고 판소리는 당대의 모든 음악적 역량을 흡수하면서 향유층을 넓혀 나갔다.판소리의 레파토리는 송만재의 〈관우희(觀優戱)>(1843)에 따르면 다섯 바탕 외에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타령〉, 〈옹고집타령〉, 〈장끼타령〉, 〈왈짜타령〉, 〈가짜신선타령〉의 열두 바탕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중 일곱 바탕은 창을 잃고 기록물로만 남아있으며, 〈가짜신선타령〉은 기록본도 아직 찾을 수 없다. 1940년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열두 바탕 중 〈가짜신선타령〉 대신 〈숙영낭자전〉으로 바뀌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궁중의 나례희나 산대희 등이 있어서 전국의 광대들이 상경하여 실력을 겨루었으며, 과거 급제자 행사인 은영연, 영친의, 문희연 등 여러 행사에 판소리 광대가 동원되면서 명창의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초의 명창인 최선달이 ‘가선대부’ 벼슬을 받은 바처럼, 어전에서 판소리를 부른 명창들이 명예직이나마 벼슬을 받는 사례도 이어졌다. 판소리 명창들은 먼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많이 배출되었는데, 19세기 전기에는 경기ㆍ충청 출신 명창들이 많이 활약했다.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신만엽, 정춘풍, 김제철, 황해천 등이 그들이다. 19세기 전기 송흥록은 전북 익산 웅포에서 운봉으로 이주하여 판소리의 통합을 이루며 동편제 유파를 발전시켜 ‘판소리의 중시조’로 추앙받았다. 19세기 후반에는 박만순, 이날치, 송우룡, 정창업, 김세종, 장재백, 김창록, 김찬업 등 많은 명창들이 호남에서 등장하면서 판소리는 큰 전승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박유전은 서편제를 창시했고, 대원군과 교유하며 강산제로 거듭 발전하였다. 박유전의 강산제는 정재근-정응민을 거쳐 보성소리 유파를 이루었다.20세기 초 근대에 이르면 경부선 철도 개통과 맞물려 경상도 지역의 명창들이 대거 서울로 상경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근대까지 경상도나 이북에서도 판소리의 향유층이 많았으며, 일제강점기까지 많은 명창들이 전국적인 포장공연을 지속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이후에 판소리는 점차 신식 공연에 밀려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 때 권번을 중심으로 여성 명창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며, 대구나 선산, 김해, 진주 등에서도 많은 명창들이 탄생하였다. 유성기음반이 보급되던 20세기 전반기에는 명창들이 음반을 취입하여 감상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 현장성보다는 음악성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 5명창인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이 타계한 이후 판소리는 여성 국극과 창극의 길로 변화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1964년 무형유산(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김으로써 1세대 무형유산 보유자가 지정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판소리 전승의 통로가 확보되었다. 현대의 판소리는 다섯 바탕인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위주로 전승되며, 한편으로 창극과 창작판소리 등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 판소리의 작품과 내용현재 전승되는 다섯 바탕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향가》는 기생 딸 춘향이가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을 만나 사랑하다가 이별하게 되는데, 변학도의 수청 요구를 거부하며 절개를 지키다 어사로 내려온 이몽룡과 재회하고 정렬부인이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청가》는 아버지 눈을 띄우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이 팔려 인당수 제수로 간 심청이가, 용궁에서 환생한 후 황후가 되어 아버지를 만나고, 결국 심 봉사는 눈을 뜨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수궁가》는 병든 남해 용왕이 토끼의 간이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 별주부를 세상에 보내 토끼를 유인하여 오게 되지만, 토끼는 거짓말로 용왕을 속이고 다시 살아 나간다는 내용이다. 《흥보가》는 악한 형 놀보에게 쫓겨난 동생 흥보가 가난으로 고생을 하다가 제비다리를 고쳐 준 대가로 박씨를 받고, 그 박 속에서 나온 쌀과 비단, 집으로 큰 부자가 되었는데, 놀보가 이를 따라 하다가 결국 망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적벽가》는 소설 『삼국지연의』 중 ‘삼고초려’와 ‘박망파 전투’,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전개하되, 군사들의 설움과 원망, 애환을 새롭게 담고, 조조가 관우로부터 살아 도망하게 되는 내용까지를 담았다. 이러한 판소리 작품들은 표면적으로는 충(忠), 효(孝), 열(烈), 우애(友愛) 등을 보여 주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조선 후기 비판적인 서민정신을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판소리의 유파와 명창현재 판소리 유파는 크게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로 구분할 수 있다. 유파는 지역적, 음악적 특성과 사승관계를 중심으로 구별된다. 중고제는 초기 판소리가 경기, 충청지역에서 발달되었던 바, 고제 소리를 이어받은 유파라 할 수 있으며 염계달(廉季達, ?~?)과 김성옥(金成玉, 1795~1830 추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음악적으로는 평우조를 중심으로 하여 담백하고 꿋꿋하며 독서성이나 정가적 발성을 특징으로 한다. 동편제는 송흥록(宋興祿, 1800년 경~1863 추정)으로부터 이어진 소리를 일컬으며, 우조를 중심에 두고 남성적인 창법으로 웅장하고 호방하게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서편제는 박유전(朴裕全, 1835~1906)으로부터 시작되어 후대에 강산제의 개발로 이어졌다. 음악적으로는 기교가 세밀하게 발달하고 계면조가 중심이 되는 것이 특징이다. 후대로 오면서 판소리 명창들은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개화기 이후에는 서울로 명창들이 다수 상경하기도 하였다. 많은 명창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유파를 가리지 않고 여러 스승들에게 두루 배우기도 하였다. 근대 5명창인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김창환, 정정렬 등은 조선성악연구회 등을 창립하여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였고, 창극 활동을 하며 여러 유파를 넘나드는 교류를 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지역적 구분보다는 가문이나 명창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전승 계보가 확립되었다. 현대 판소리에서는 정응민제(보성소리), 김연수제(동초제), 김소희제(만정제), 박록주제, 박초월제(미산제), 박봉술제, 박동진제 등 근대 명창을 중심으로 새롭게 확립한 유파의 분파가 이루어졌다.
최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