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女性國劇)은 ‘여성(女性)’만 출연하는 ‘국극(國劇)’을 지칭하는 용어로, ‘국극(國劇)’에는 1950년대에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과 정통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해방 직후
아악과
민속악을 통틀어 ‘국악(國樂)’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창극을 ‘국극’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에 여성국극을 ‘여성창극’이라고도 칭한다.
여성국극의 연원은 여성 공연 집단의 전통 및 창극 공연의 흐름과 연결된다.
농악의 잡색놀이나 가면극, 꼭두각시놀음 등 본래 전통극의 연행자는 대개 남성 광대였다. 솟대장이패, 굿중패,
남사당패 등 전문 연희패나 유랑예인집단의 인적 구성도 남성에 국한되었으며, 판소리 역시 19세기 중반 기생 금향선(錦香仙, ?~?) 같은 사례가 있기는 했으나 진채선(陳彩仙, 1847~?)의 등장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여성의 참여가 불가한 영역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무당ㆍ여사당패ㆍ관기 등이 여성 공연 집단의 전통을 계승해 왔으며, 근대 이후에는 각종
기생조합(권번)이나 극장에 소속된 기생이 그 뒤를 이었다. 광교기생조합ㆍ다동기생조합ㆍ신창기생조합ㆍ한남기생조합ㆍ평양기생조합 등이 주도한 기생조합연주회의 레퍼토리는 무용ㆍ음악ㆍ연극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판소리를 연극화한 〈춘향전〉ㆍ〈심청전〉이나 고소설을 각색한 〈홍문연연의〉ㆍ〈구운몽연의〉 같은 신작도 그 일부였다. 기생조합(권번)은 역사극이나 신파극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공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점차 비중이 약화되었다. 다만 여배우로서의 기생이 남녀 배역을 모두 도맡아 하는 가무악극이라는 공연 양식의 측면에서 볼 때, 기생조합(권번)의 연극이 여성국극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1920년대 후반부터 신파극이나 유행가의 인기에 부응해 가극(歌劇)이 새로운 연극 양식으로 자리 잡았는데, 일본의 소녀가극단을 모방한 삼천가극단ㆍ소녀가극단ㆍ낭랑좌 등 여성가극단이 조직되었다. 이들 여성가극단은 기생조합연주회가 쇠퇴하는 틈을 메우며 여성 연극 단체의 맥을 이었고, 역시 여성만으로 구성된
여성농악단도 비슷한 시기에 조직되었다. 1940년대에는 일본의 소녀가극단을 대표하는 다카라즈카의 내한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이들의 레퍼토리와 공연 방식이 당시 국내 공연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정리하면, 여성국극의 양식이 정립되는 데 노래와 춤의 화려한 쇼가 중심이 되는 일본의 다카라즈카 또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오페라ㆍ뮤지컬 등 서구식 음악극이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나, 전근대 시기부터 여러 여성 공연 집단이 축적해 온 예술적 역량이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기존의 남녀 혼성 창극에서 여성 배우가 남장을 통해 남성 배역을 소화하는 방식을 시도한 것도 여성국극의 연원과 연결된다. 박귀희(朴貴姬, 1921~1993)가 동일창극단의 1944년 〈일목장군〉 공연에서 일목장군 역을, 1945년 〈춘향전〉 공연에서 이도령 역을 맡아 호응을 얻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일창극단에서 남역을 소화한 경험이 있는 박귀희를 포함해 박녹주(朴綠珠, 1905~1979)ㆍ김소희(金素姬, 1917~1995)ㆍ임춘앵(林春鶯, 1924~1975) 등이 1948년 9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10월 여성국극 〈옥중화〉를 공연했다. 판소리 명창인 박녹주와 김소희가 각각 작곡과 안무를, 일본에서 연극을 공부한 김아부와 김주전(金主傳, ?~?)이 각각 연출과 진행을 맡았으며, 전문 무대미술가였던 원우전도 제작에 참여했다. 성춘향은 김소희, 이몽룡은 임춘앵, 변사또는 조유색(趙柳色, ?~?)이 맡았다. 〈옥중화〉는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으나 여성국극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민족오페라’라는 이름을 내걸었다는 점에서는, 여성국극을 민족주의적 전통 예술로 각인시키고 민족예술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의도가 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