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군당제, 서울부군당도당굿.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마을제당인 부군당에서 음력 정월 초하루나 시월 초하루에 마을신을 모시는 마을굿.
부군당굿은 조선 시대 각 관서의 부속 공간으로 갖추어진 신당인 부군당의 제의에서 비롯되었다. 부군당굿은 서울 개인굿의 구조에 유가돌기, 부군거리, 군웅거리, 황제풀이 같은 절차들이 추가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즐기는 마을굿으로서 축제적 양상을 띠었다. 압축 성장 시기와 도시화를 거치며 서울의 여러 마을 공동체가 변함에 따라 부군당굿의 전승이 상당수 중단되었다. 현재 전승 중인 일부 부군당굿의 사례들도 유가돌기나 황제풀이와 같은 부군당굿의 특징적인 거리들은 대체로 생략되고, 마을굿이 갖는 축제적 성격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 그런데 21C 진입을 전후해서 지자체 차원에서 부군당굿을 제도와 정책을 통해 지원하고 안정적 전승 기반의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 시대 각 관서의 부군당(符君堂)은 전국적으로 그 분포가 확인되며, 부군당에서는 하급 관리들의 주도로 유교식 제례나 무당들의 굿이 열렸다. 조선 시대 수도였던 서울에는 여러 관서가 많았던 특성상 부군당의 분포가 가장 두드러졌다. 조선 후기 관리인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가 남긴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에 의하면 사복시ㆍ종친부ㆍ공조ㆍ제용감ㆍ선혜청 등의 관서에 신당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연암집(燕巖集)』 등 다수의 기록에는 '중앙과 지방의 주현의 이청에 부군당이 없는 곳이 없었고, 각 부군당에서는 서리와 아전들이 재물을 거두어 부군당굿을 열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 시대 각 관서에 부속된 신앙 공간으로서의 부군당 제의는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이재난고(頤齋亂藁)』, 『연암집(燕巖集)』,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 여러 기록을 통해 매우 보편적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부군당은 전국적으로 분포했으나, 17세기~19세기에 걸쳐 많은 인구가 집중되었던 서울의 한강변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분포가 나타난다. 특히 미곡과 땔나무ㆍ어염 등의 대량거래와 조선, 제빙 등의 제조업을 겸한 자본축적 등을 통해 성장한 용산, 마포, 서강, 서빙고, 두모포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했다. 용산과 서강에는 군자감이나 광흥창 등과 같이 관에서 설립한 보관 창고들과 관청이 많이 분포했다. 조선 후기에는 행정적 편제인 계(契)를 통해 마을들이 관청과 연관을 맺게 되었다. 한성부의 계는 오부-방-계로 체계화되었는데, 계는 한성부의 최말단 행정단위이자 응역(應役) 조직이었다. 이처럼 행정 단위인 계로 편제되어 관청과 연결된 마을 사람들은 관청제사인 부군당의 제사를 마을제사화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 개요
서울 부군당굿은 주로 음력 정월 초하루와 10월 초하루에 집중적으로 열리고 있다. 부군당굿이 열리는 장소는 부군당의 내외부 공간이다. 부군당은 대개 1~3칸 규모로, 규모면에서 숙천제아도에 소개된 제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당의 내부에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주신인 부군 혹은 부군 내외를 그림으로 그려 중앙에 봉안하였다. 부군당의 주신은 마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마포구 창전동 부군당의 부군은 공민왕이며, 김유신(보광동 부군당), 제갈공명(보광동 둔지미 부군당), 단군(동빙고동 부군당), 태조 이성계(서빙고동 부군당), 조반(전농동 부군당), 관우장군 내외(중구 방산동 성제묘) 등이 부군으로 모셔지고 있다. 주신인 부군의 좌우에는 용왕, 대신, 칠성, 제석, 산신 등이 봉안되어 있다.
서울 부군당굿은 당주무당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데, 당주무당은 해당 마을의 부군당굿을 전담하는 무당이다. 당주무당의 역할은 무(巫)의 신내림과 학습 과정에서 형성되는 신어머니와 신딸의 관계를 바탕으로, 마을굿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제자 무당이 이어가게 된다. 부군당굿에 참여하는 악사 또한 당주무당과 같이 각 마을의 부군당굿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마을 사람들과 유대를 맺고 있으며, 당주무당과 마찬가지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어지는 계보를 가지고 있다.
○ 절차와 구성
서울 부군당굿은 서울 지역 개인굿의 구조를 기본으로 하되, 마을 주민들 가운데 제관으로 뽑힌 사람들의 유교식 제례가 같이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유가돌기, 부군거리, 군웅거리황제풀이와 같이 부군당굿의 특징적 절차들이 추가되는 형식이다. 일례로 2018년에 열린 용산구 용문동 남이장군사당제는 주당물림, 부정청배와 가망청배, 부군거리, 불사거리, 본향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신장거리, 대감거리, 제석거리, 성주거리, 창부거리, 황제풀이, 군웅거리, 뒷전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부군거리는 남이장군이 마을신이어서 장군신장과 대감을 모시는 거리로서 먼저 불러 모신다.
보광동부군당굿은 2000년대 중반 무렵까지 음력 정월 초하루에 유교식 제사와 당주고사가 먼저 지낸 후 유가돌기를 먼저 했다. 이어서 주당물림ㆍ부정청배ㆍ가망청배, 당신모시기(대잡이), 도당거리, 본향가망, 대신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신장거리, 대감거리, 불사거리ㆍ성주거리, 창부거리, 뒷전, 소지올리기가 행해졌다. 큰한강부군당굿은 주당물림, 부정청배, 가망청배, 진적, 불사거리, 도당거리, 대안, 성주거리, 창부거리, 군웅거리, 소지, 뒷전, 사례의 순이다. 이들 두 부군당굿에서는 도당거리에서 마을신을 모시고 있다.
서울 부군당굿의 절차 가운데 개인굿과 달리 특징적인 거리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유가돌기와 부군거리ㆍ군웅거리ㆍ황제풀이 등이다. 유가돌기는 굿을 하기 전에 아침 일찍 화주집에서 아침을 먹고 당주무당과 악사 일행이 마을의 각 집을 다니는 것으로, 각 가정마다 상에 초를 켜고 쌀 한 말과 실 한 타래, 돈 등을 차려 마당에 내놓으면 당주무당이 굿을 한 거리씩 해 주는 절차이다. 이 절차를 통해서 각 가정의 안위를 위하고, 굿에 참여한 무당과 악사의 수고비를 확보하기도 한다.
부군거리는 서울 부군당굿의 주신인 마을신을 모시는 절차이다. 일부 마을굿에서는 도당거리에서 마을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용산구 한남동의 큰한강부군당굿에서는 도당거리를 당주무당이 진행하며, 산공수, 부군, 본향마누라, 가망, 말명, 대신 순으로 모시고 있다. 이 거리에서는 이전에 부군당굿을 주관했던 당주무당(堂主巫堂)과 제관인 화주(化主 혹은 사례에 따라 火主로 표기)를 담당하다 돌아가신 분들이나 돌아가신 마을 주민들이 조상신으로 당주무당에게 들어와서 후손들에게 공수를 주기도 한다.
군웅거리는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마을굿에서만 연행하는 굿거리로, 군웅신을 모셔 활과 화살을 메고 마을 밖으로 활을 날려 액을 내몬다. 군웅 활쏘기가 끝나면 밥을 담는 소래기인 밥소래를 입에 붙이는 밥솥띄기를 해서 군웅신의 위력을 보여준다.
황제풀이는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성주굿에 불렀던 무가이다. 국가무형문화유산 제104호 새남굿보존회장이자 전수조교인 이성재(李成宰, 1956~)가 소장한 황제풀이 필사본에 의하면, 황제풀이는 크게 황제가 집안에서 놀면서 복을 채워주기를 기원하고, 성주의 본(本) 제시, 소나무가 자라서 재목 운반, 집짓기. 집 안의 치장 소개. 부귀공명 기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의 마을굿에서 황제풀이가 보편적으로 행해졌으나, 현재는 용산구 남이장군사당굿에만 남아있다. 굿이 모두 끝나면 화주가 부군당 안으로 들어가 부군에게 인사를 드리는 사례치성 절차가 있다.
서울 부군당굿의 구조는 개인굿이 확장된 형태로 대체로 유사한 편이나, 마을에 따라 더 중요시하거나 강조하는 거리가 있다. 예를 들어 큰한강부군당에서는 불사가 가장 으뜸으로 인식되어, 본격적인 굿거리 중에서는 불사거리를 가장 먼저 시작한다. 용산구 용문동 남이장군사당제에서는 남이장군이 마을신이어서 장군신장과 대감을 모시는 거리로서 여러 굿거리 중 가장 먼저 진행한다.
○ 음악적 특징
서울 부군당굿의 무가와 춤의 반주음악에는 삼현육각에서 북을 제외한 피리, 대금, 해금, 장구와 징, 제금 등이 사용된다. 이 가운데 장구와 제금 등은 무녀가 직접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악사는 주로 삼잽이로 구성되어 피리와 대금, 해금 등을 연주하는 악사가 참여하고 있다. 부군당굿의 음악은 무당의 무가와 춤을 위한 것이다. 서울 부군당굿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남이장군사당제의 경우 무가로는 청배와 만수받이, 노랫가락, 타령 등이 있으며, 굿거리와 당악, 허튼타령, 반염불, 거상 등의 장단이 춤에 사용되고 있다. 그 외, 굿을 시작하기 전에 장구와 징을 요란하게 쳐서 굿하는 장소를 정화하는 주당물림에는 물림장단을 사용한다
○ 역사적 변천 및 현황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부군당굿은 근현대 시기에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일제강점기에는 부군당굿 연행의 공간이자 신앙의 중심인 부군당 자체가 제자리를 잃기도 했다. 일본군 기지가 만들어진 용산 지역에서 둔지미부군당과 이태원부군당이 제자리를 잃은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해방 이후에도 부군당굿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그리 좋지 못했다. 서울에 많았던 부군당굿들이 압축성장의 시기와 도시화 과정에서 그 기반을 잃어갔다. 부군당굿의 제장이 사라지는 것에 더하여 부군당굿의 든든한 기반이 되는 마을 공동체가 와해되거나 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부군당굿의 특징적 거리들이 축소되고, 유교식 제례로 대체되기도 했다. 부군당굿 전승이 끊기는 사례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그런데 21세기 진입을 전후하여 서울시 차원이나 구 차원에서 부군당굿에 주목하여 지역 문화자원으로 인식하고 지원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시나 구 차원에서 무형유산 지정과 같은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안정적 전승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한 양상이다.
서울 부군당굿은 조선시대 각 관서의 부속 공간으로 갖추어진 신당(神堂)인 부군당의 의례에서 비롯되어 마을굿의 역사와 유래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서울의 부군당은 부군당이 조선 후기에 민간으로 확산되면서 부군당굿은 서울의 대표적인 굿이 되었고, 특히 한강변을 중심으로 집중 분포하게 되었다.
마을굿으로서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축제적 양상을 띄고 있는 서울부 군당굿은 서울 지역 개인굿의 구조를 기본으로 하되, 마을 주민들 가운데 제관으로 뽑힌 사람들의 유교식 제례가 동시에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유가돌기, 부군거리, 군웅거리, 황제풀이와 같이 부군당굿의 특징적 절차들이 추가되는 형식이다. 서울 부군당굿의 핵심은 마을의 안녕과 기복을 구하기 위한 마을신에 대한 신앙과 그것의 행위적 표현으로서의 제의이다. 그 제의는 마을의 잔치이자 축제의 의미도 가지고 있어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즐기게 하는 역할을 해 왔다.
오문선(吳文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