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당악정재로, 무용수들이 꽃을 들고 궁궐의 봄빛 완연한 풍경과 봄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춤.
육화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악학궤범(樂學軌範)』(1493) 권4 「시용당악정재도의」로, ‘여섯 사람이 각각 꽃을 들고 추는 꽃춤[화무(花舞)]으로, 송나라의 대곡(大曲)에서 나온 것 같다.’고 되어 있다. 이후 약 400년간 등장하지 않다가 고종대의 『(계사)여령각정재무도홀기』(1893), 갑오 『외진연시무동각정재무도홀기』(1894), 신축『외진연시무동각정재무도홀기』(1901)등에 수록되어 전한다. 육화대의 죽간자 구호 ‘육궁(六宮; 고대 황후의 침전 6곳)의 치장을 본받았고’와 중심 무용수의 ‘새로운 노래를 상국에서 가져오고, 옛 고사에서 전고를 얻어 문장을 만들었다’는 악장을 통해 육화대가 중국의 ‘화무(花舞)’를 토대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육화대의 내용은 꽃을 든 여섯 명의 무용수들이 봄꽃으로 어우러진 화려한 궁궐의 정경과 복숭아꽃ㆍ살구꽃ㆍ해당화ㆍ배꽃ㆍ장미화ㆍ산복숭아나무꽃 등 여섯 꽃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으로 화려한 미감을 담아내고 있다.
○ 절차와 구성
육화대는 당악정재이므로 의물을 든 18명과 개를 든 4명이 들어가고, 한 손에 꽃을 든 여섯 명의 무용수가 좌(동쪽)에 3명, 우(서쪽)에 3명으로 나눠 서고, 중심 무용수(치어인)가 중앙에 위치한다. 이 초입배열의 모습을 『악학궤범』에 표시했는데, 중무를 중심으로 좌무 3인은 각각 지지(地支)의 인(寅), 묘(卯), 진(辰)의 자리이고, 우무 3인은 신(申), 유(酉), 술(戌)의 자리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남북으로 북향에는 팔괘(八卦)의 건(乾), 감(坎), 건(乾)이, 남향에 곤(坤), 리(离), 손(巽)이 설정되었다. 이러한 설정은 육화대의 춤 구성에 유교악론에서 팔괘의 운용을 적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육화대의 진행은 ① 죽간자가 나아가 ‘문화심사(問花心詞)’를 하고 물러나면, 중심 무용수가 오른 소매를 들고 ‘화심답사(花心答詞)’로 답창하고 뒤로 물러나기 ② 동쪽과 서쪽의 좌우대형으로 서 있던 무용수들이 교대로 나아가되 동쪽의 무용수는 오른손으로 꽃을 받들고 왼쪽의 무용수는 왼손으로 잡고 나아가 일념시(一念詩)ㆍ이념시(二念詩)ㆍ삼념시(三念詩)를 부르고 물러나기 ③ 무용수 여섯 명이 둥글게 춤추며 돌아 남[손리곤(巽离坤)]ㆍ북[건감간(乾坎艮)] 전후대형으로 선다. 육화대는 좌우(동서) 두 대로 나뉘어 들어오고, 춤출 때는 육화대는 좌우(동서) 두 대로 나뉘어 들어오고, 춤출 때는 남북대형으로 서서 연행한다. 동서와 남북 간 대형을 자리바꾸거나 마주보거나 등을 맞대고 춤을 추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 주요 춤사위
육화대의 춤사위는 족도ㆍ염수족도ㆍ사수무ㆍ팔수무ㆍ협수무ㆍ퇴수무가 사용되었다. 두 대 좌우대형에서 북향하여 춤출 때 사수무를 추고, 좌우대형에서 전대 세 명과 후대 세 명이 환대할 때에는 팔수무를 추며, 종결부에 좌우 여섯 명이 무진ㆍ무퇴할 때에는 협수무와 퇴수무를 추었다.
○ 창사
육화대는 당악정재이므로 죽간자의 구호가 있고, 창사도 많은 궁중무이다. 도입부에서 죽간자의 ‘문화심사(問花心詞)]가 있고, 치어를 하는 중무가 ’화심답사(花心答詞)’로 화답의 노래를 한다. 이어서 좌우 6명의 무용수들은 번갈아가며 일념시(一念詩)ㆍ이념시(二念詩)ㆍ삼념시(三念詩), 일념가(一念歌)] 농, 일념가(一念歌)] 계락, 이념가(二念歌)] 편, 삼념가(三念歌)를 부른다. 창사는 다음과 같다.
원문 |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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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간자 구호:문화심사(問花心詞)]) |
新花在手, 逞綽約之春光. |
새 꽃 손에 들고 |
[창:화심답사(花心答詞)] |
顧慚微品, 願助陳歡. |
생각건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부끄럽지만, |
[창:일념시(一念詩)] |
折得慇懃色正新, 嬌紅嫩綠露初均. |
정성스럽게 꺾어 보니 빛깔도 정말 고와 |
[창:일념시(一念詩)] |
艶杏暗燒錦色新, 谷園初折一枝均. |
살구꽂 남몰래 타듯 피니 비단처럼 새뜻하여 |
[창:이념시(二念詩)] |
海棠花發錦江新, 宮女紅粧醉未均. |
해당화 피어나니 금강(錦江)이 새뜻한데, |
[창:이념시(二念詩)] |
玉容淡佇對佳新, 輕折枝枝傅粉均. |
옥 같은 자태를 기다리다 곱고 새뜻한 모습 마주하니, |
[창:삼념시(三念詩)] |
金刀初剪露痕新, 輕疊羅黃密綴均. |
금 칼로 자르자말자 이슬 흔적 새롭고 |
[창:삼념시(三念詩)] |
小桃破萼錦鮮新, 迎日夭夭美艶均. |
작은 복사꽃 꽃망울 터뜨리니 비단처럼 새뜻하고 |
[창:삼념시(三念詩)] |
金刀初剪露痕新, 輕疊羅黃密綴均. |
금 칼로 자르자말자 이슬 흔적 새롭고 |
[창:삼념시(三念詩)] |
小桃破萼錦鮮新, 迎日夭夭美艶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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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일념가(一念歌)] 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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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일념가(一念歌)] 계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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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이념가(二念歌)]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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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이념가(二念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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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삼념가(三念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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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삼념가(三念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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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간자 구호] |
新花在手, 逞綽約之春光. |
어여쁜 붉은 빛, 연한 초록빛은 |
○ 반주 음악
『악학궤범』에 전하는 조선 전기의 육화대 반주음악은 〈천년만세〉ㆍ〈최자령〉ㆍ〈중강령〉이 사용되었다. 『(계사)여령각정재무도홀기』에 전하는 조선 후기의 반주음악은 〈보허자령〉과 〈향당교주〉로 변화가 있었고 국문 노랫말을 부를 때에는 가곡의 〈농락(弄樂)〉ㆍ〈계락(界樂)〉ㆍ〈편(編)〉에 맞추어 불렀다.
○ 복식ㆍ의물ㆍ무구
육화대의 복식은 조선 전기에는 동쪽의 무용수 세 명은 홍의(紅衣), 서쪽의 무용수 세 명은 남의(藍衣)를 입었다. 조선 후기 『(계사)여령각정재무도홀기』에 나오는 복식은 조선 전기와 동일하지만, 『신축진찬도병』(1901)에는 동쪽 세 명은 옥색의(玉色衣)ㆍ자적의(紫赤衣)ㆍ양람의(洋藍衣)를 입고, 서쪽 세 명은 초록의(草綠衣)ㆍ진홍의(眞紅衣)ㆍ분홍의(粉紅衣)를 입었다.
○ 역사적 변천 및 전승
육화대는 시대별로 변화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여섯 명의 무용수가 칠언 사구((七言 四句)의 한시를 번갈아 한 번씩 부르고 회무(回舞)를 돌면서 춤추는 대형으로 나아갔으나, 조선후기에는 첫 번째 회무 후 좌우(동서)대형으로 나누어 서고, 다시 동쪽의 무용수부터 한 명씩 교대로 여섯 명까지 국문 가사를 부른 뒤 무용수 여섯 명이 좌우로 둥글게 돌면서 춤을 추었다. 중심 무용수는 꽃을 잡지 않았으며, 조선 전기에는 동쪽의 무용수는 오른손에 꽃을 잡고 서쪽의 무용수는 왼손에 꽃을 잡았으나, 조선 후기 고종 『(신축)진찬의궤』ㆍ『진연의궤』(1901)에 수록되어 있는 정재도에는 무용수 여섯 명 모두가 오른손에 꽃을 잡고 춤추었다. 그리고 1990년대 국립국악원의 주도하에 김천흥(金千興, 1909~2007)에 의해 재현되었고, 현재 국립국악원을 비롯하여 민간무용단체의 공연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
김경숙(金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