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대는 원래 조선 전기에 창작된 당악정재이다. 송나라의 대곡(大曲)에 등장하는 화무(花舞)를 원형으로 하여 세종대 이후 창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 후기에 향악화(鄕樂化)되어 진주 교방을 중심으로 추어졌다.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의 『교방가요(敎坊歌謠)』(1872)에 경상도 진주 교방의 춤 종목으로 육화대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국조시악(國朝詩樂)』,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가오고략(嘉梧藁略)』과 『임하필기(林下筆記)』 등 여러 문집에서도 육화대에 대한 언급이 확인된다. 특히 『가오고략』에는 “여섯 대가 한 송이 꽃을 받들어, 여섯 무용수가 박을 치며 꽃을 들고 춤춘다.(六隊成分奉一花,花隊六人,擊拍奉花而舞)”라는 구절이 실려 있어 육화대의 편성과 작법을 알 수 있다. 또한 『임하필기』 「해동악부(海東樂府)」에도 《육화대》라는 명칭이 수록되어 있어, 육화대가 궁중 정재를 넘어 교방의 악부 항목으로 전승·기록되었음을 보여준다.

육화대는 ‘여섯 송이 꽃처럼 구성된 대형(隊形)’을 뜻하며, ‘화(花)’는 무용수를 상징하고 ‘대(隊)’는 춤의 진형(陣形)을 의미한다. 즉 여섯 명의 무용수가 중앙의 채화를 중심으로 원을 이루어 추며, 쌍쌍이 마주 보는 대무 형식으로 전개된다. 창사는 꽃과 나비의 이미지를 통해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조화를 노래하며, 풍류적 정서를 표현한다.
○ 절차와 구성
교방춤 육화대는 소기(少妓) 4명과 동기(童妓) 2명, 총 6명의 무용수로 구성된다. 궁중의 육화대가 화심(花心)에 해당하는 무용수들이 중심에서 춤을 추는 형식이라면, 교방춤 육화대는 중앙에 놓인 꽃[채화(彩花)]을 중심으로 여섯 명의 무용수가 둘러서서 춤추는 점이 특징이다. 『교방가요』에는 그 절차가 간략히 전한다.
도입부에서는 여섯 명의 무용수가 일제히 절하며 춤을 시작하고, 전개부에서는 음악이 시작되면 쌍쌍이 짝을 이루어 서로 마주 보며 춤추고, 중앙의 채화를 둘러싸며 주위를 돌며 춤춘다.
이후 꽃가지를 꺾어 춤추면서 이동하며 각각 타래 머리에 꽃을 꽂고 춤을 이어간다. 종결부에서는 다시 일제히 절하고 마무리한다.
○ 창사
교방춤 육화대에는 칠언절구(七言絶句)의 가사만이 전한다. 쌍쌍이 나비가 꽃 사이를 노닐다가 꽃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은 여인의 모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전체적으로 자연(꽃·나비)과 인간(무용수)의 아름다움이 서로 어우러지는 풍류의 순간을 형상화한 노래로, 나비가 꽃에 날아와 노니는 모습과 소매를 나부끼며 춤추는 기녀의 동작을 신선의 세계에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창사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雙雙紛蝶弄花來, 彩袖翩翩繞幾回.
쌍쌍분접농화래, 채수편편요기회.
쌍쌍이 고운 나비라 꽃에 날아와 제 맘대로 노닐다가.
빛깔 고운 소매를 나부끼며 감고 돌기 몇 번이던가.
折得瓊枝揷烏髻, 延光仙子下瑤臺.
절득경지삽오계, 연광선자하요대.
옥 같은 아름다운 꽃가지 꺾어 들어 새까만 타래머리에 꽂았으니.
연광선자가 요대에 나린 듯.
출처: 성무경 역주, 『교방가요』, (보고사, 2002)
○ 연행적 특징
본래 당악정재였던 궁중의 육화대는 지방 교방으로 전파되면서 형식과 내용이 변하였다. 죽간자(竹竿子)가 생략되고, 시작과 끝을 절하면서 맺는 간결한 형식으로 변화하였으며, 춤 사이에 삽입되던 갖가지 꽃을 찬미하는 창사도 생략되었다. 또한 궁중의 화심 무용수가 사라지고, 중앙의 채화를 중심으로 둘러 춤추며, 꽃을 손에 들고 돌다가 타래머리에 꽂는 등 교방무 특유의 서정성과 단아한 풍류미를 가미한 점이 특징이다.
○ 반주 음악
교방에서 연행된 육화대의 반주음악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방가요』에는 해금(奚琴), 적(笛; 대금), 잠율(箴篥; 세피리) 2, 장고(杖鼓), 교방고(敎坊鼓) 등이 함께 연주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의 향악 반주가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복식ㆍ의물ㆍ무구
현재 『교방가요』는 국립중앙도서관본(국립본)과 고려대학교본(고려대본)이 전한다. 그림으로 전하는 복식 기록에 따르면, 국립본에서는 6명의 무용수가 모두 초록색 저고리와 붉은색 치마의 평복(平服)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고려대본에서도 평복 치마저고리로, 대부분 노란색 저고리에 세 명은 남색 치마를, 세 명은 붉은색 치마를 입었으며, 그중 한 명만이 초록색 저고리를 착용하고 있다. 이는 왕을 위한 연향이 아닌 교방의 공연이었기 때문에, 궁중 육화대에서 보이는 격식을 갖춘 복식과 달리 간결하고 실용적인 복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구(舞具)는 중앙에 설치된 채화(彩花) 한 가(架)와, 무용수들이 손에 들고 춤추는 여섯 개의 꽃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 역사적 변천 및 전승
교방춤 육화대는 조선 후기 교방을 중심으로 진주를 비롯한 통영·전주 등 여러 지역 교방으로 전파되어 향악화되었다. 근대 이후 지방의 교방제도가 폐지되면서 전승이 단절되었다. 현재는 복원 공연과 연구를 통해 그 형식이 재조명되고 있다.
최경자(崔慶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