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 변천과 전승
서울의 선소리패에는 이의택(李義澤)과 박종대(朴鐘大)라는 두 사람이 나타나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신낙택(申洛澤)으로 전승되었으며, 서울 주변의 여러 곳에 선소리패가 생겼다. 《산타령》은 다리밟기[踏橋] 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였다. 구한말까지도 서울의 왕십리와 뚝섬을 잇는 ‘살고지다리’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 놀이가 행해졌는데, 이날 밤에는 서울ㆍ경기 일원의 《산타령》패(牌)들이 전부 모여 산타령을 부르며 밤새워 놀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이 되자 예전에 이름을 날렸던 《산타령》의 명인들이 타계하고 이창배(李昌培, 1916~1983)ㆍ김태봉(金泰鳳, 1898~1970)ㆍ유개동(柳開東, 1898~1975)ㆍ김순태(金順泰, 1914~1978)ㆍ정득만(鄭得晩, 1907~1992) 등 몇몇 사람들에 의해 《산타령》이 전승되었다. 이들은 사설 학원 등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방송 출연, 음반 취입 등의 음악 활동을 하였다. 한편, 서도의 선소리패로는 평양의 날탕패가 이름을 날렸는데, 1930년대에 녹음된 대부분의 《산타령》이 평양 날탕패계의 노래였다. 서도 《산타령》으로 이름 있던 사람은 우선 허득선(許得善)을 꼽을 수 있겠는데, 그는 고종 때 사람으로 서도 《산타령》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도 날탕패로 유명했던 문영수(文泳洙, 1867~1930)나 이정화(李正華, 1865~1920) 등이 협율사 시절, 서도 《산타령》을 불러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경기 명창 박춘재 등과 더불어 서도 《산타령》을 주고받으며, 서울 원각사에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이때부터 《산타령》은 경기ㆍ서도의 구별 없이 선소리 명창들이면 다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산타령》의 계보는 왕십리패를 이끌었던 이명길(李命吉, 1890~1960)의 제자 이창배와 과천패 소완준(蘇完俊)의 제자 정득만의 소리가 전승되고 있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선소리《산타령》’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이후 이창배의 후계자인 황용주(黃龍周, 1937~2022)가 1992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 외에 명예 보유자 최창남(崔昌南, 1935~2022)이 있고, 방영기ㆍ이건자(李建子, 1960~)ㆍ최숙희(崔淑姬, 1959~) 등의 전승교육사들과 ‘선소리산타령보존회’ 회원들이 경·서도 선소리《산타령》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연행 시기 및 장소
1920ㆍ1930년대에 이르러 원각사나 광무대와 같은 극장 무대를 중심으로 선소리《산타령》이 불렸다.
○ 음악적 특징
선율구조는 경토리 계통(경토리ㆍ반경토리)에 전반적으로 고음역에서 질러 내는 소리와 4도 이상의 도약 진행이 많다. 또한 원래 남자들이 합창으로 부르는 음악이기 때문에 활달하며 씩씩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사설의 내용은 경기 《산타령》은 산천경개를 노래했고, 서도 산타령은 산천경개와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행은 유희적이고 놀이적인 요소가 강한 노래와 발림춤으로 구성되었으며, 정해진 박자 안에서 진행되지 않고 노랫말에 따라 변하는 장단 형태를 가지고 있다.
○ 형식과 구성
《산타령》이 수록되어 있는 20세기 초의 잡가집들을 살펴보면, 《산타령》은 잡가의 하위 갈래 악곡으로 이루어진 <판염불>·<앞산타령>·<뒷산타령>·<자진산타령>의 구성과 <놀량>·<사거리>·<중거리>·<경발림>의 구성이 구분되어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이때부터 두 가지 계통의 《산타령》이 각각 네 곡으로 레퍼토리화 되어 연창 형식으로 불려졌던 것을 말해주고 있고, 이는 각기 머릿곡의 이름을 따서 판염불계 산타령과 놀량계 산타령으로 분류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판염불계 산타령은 현행 경기 산타령으로 놀량계 산타령은 현행 서도 산타령으로 전승되었음이 연구 결과 밝혀져 있다. 현행 경기 산타령은 〈놀량〉ㆍ〈앞산타령〉ㆍ〈뒷산타령〉ㆍ〈자진산타령〉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도 산타령은 〈놀량〉ㆍ〈앞산타령(사거리)〉ㆍ〈뒷산타령(중거리)〉ㆍ〈경발림(경사거리)〉으로 구성되어 있다.
○ 동영상 및 음원
신현남(申鉉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