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진주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탈놀이
진주오광대는 영남지역 오광대의 전통을 갖춘 탈놀이로, 일제강점기에 1928년 정인섭이 조사를 시작한 이래로 1930년대 송석하(宋錫夏, 1904~1948), 해방 이후 최상수, 이명길(李命吉) 등이 정리한 대본이 전한다. 또한 송석하와 최상수가 수집한 탈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전승 자료가 일찍이 수집정리되었으나 실제 전승은 이어지지 못하다가, 수차례의 복원노력 끝에 1998년에 본격적인 복원에 성공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놀이의 구성은 총 다섯 마당으로 제1과장 〈신장놀음〉, 제2과장 〈오탈놀음〉, 제3과장 〈말뚝이놀음〉, 제4과장 〈중놀음〉, 제5과장 〈할미놀음〉 등으로 구성되었다.
주지역에서는 두 종류의 오광대가 연희되었다고 전한다. 그 하나는 진주에 본거지를 둔 유랑예인집단인 솟대쟁이패들의 탈놀이와 다른 하나는 진주 도동면 소재 하대리(현 진주시 하대동)에 전승하던 도동오광대(道洞五廣大)가 연행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30년대 송석하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진주오광대는 1880년 무렵 의령군(宜寧郡) 부림면(富林面) 신반리(新反里) 대광대패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으며, 이후 가산오광대에 영향을 끼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달리 구전에 의하면 합천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가 진주에 와서 공연한 것을 보고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둘 다 오광대 탈놀이가 외부의 놀이패들의 놀이를 보고 만들어진 것임이 확인된다. 둘 모두 전해진 시기를 조선 후기인 19세기 말 경으로 본다. 진주오광대는 1920년대까지 지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부흥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곧 단절되었다. 부흥을 위한 사례로 1934년 진주의 부인위친계(婦人爲親契), 제3야학회(第三夜學會), 각 신문지국 등이 주동해서 놀이를 지원하기도 했으나, 1937년 이후로 그 명맥이 끊어졌다.
○ 역사적 변천 과정 1934년 진주의 부인위친계(婦人爲親契), 제3야학회(第三夜學會), 각 신문지국 등이 주동이 되어 놀이를 부흥시키고자 지원하기도 했으나, 1937년 이후로 그 명맥이 끊어졌다. 광복 이후에 진주오광대의 복원을 위해 학자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사례로 광복 이듬해에 개최된 '개천예술제'에서 공연하였다. 당시 참가한 김치권(金致權), 최선준(崔善俊) 등은 1930년대에 오광대를 재연해서 1958년까지 진행했다. 또한 1961년에도 이명길 등이 새로 정리한 연희본을 만들어 복원하고자 했으나 전승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진주오광대는 우리나라 가면극 중에서 최초로 그 대본이 채록되었던 가면극으로 채록본 4종이 전한다. 1928년 『강석진 구술 정인섭 채록본』, 1934년 『박용근 구술 송석하 채록본』, 1957년 『최선준 구술 최상수 채록본』, 『이명길 채록본』이다. 탈도 현존하고 있으며, 생존 연희자의 증언까지 전승이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복원을 위한 노력을 펴쳐왔다. 이 과정을 통해 1996년 《진주탈춤한마당》을 계기로 진주오광대를 복원 문화운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1997년 5월 '진주탈춤 한마당 학술심포지움'에서 진주오광대 복원의 가능성과 필연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복원에는 1970-80년대 대학 탈패 출신의 정병훈, 강동옥이 주축이 되어 본격적으로 재연 작업에 착수했다. 전해지는 4개의 대본을 토대로 김수업이 복원용 대본을 작성하고, 당시 유일한 생존 연희자인 배또문준(裵又文俊)이 춤을 복원하게 된다. 탈은 1934년 당시 송석하가 수집해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탈을 원본으로 삼아서 복원했다. 이외에 의상과 음악, 연희동작 등 각 부문별로 전문가들의 자문과 지도로 1998년 5월 23일 《제3회 진주탈춤한마당》에서 60년 만에 복원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게 되었다. ○ 연행 시기와 장소 진주오광대는 진주지역에서 정월달 세시풍속의 일환으로 전승되어 왔다. 정월대보름에 수정산(水晶山) 마루에 보름달이 뜨는 시각에 맞추어 달집을 태우면, 매구잽이들이 악기를 치는 소리에 따라 연행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에는 진주공설운동장(계동), 30년대에는 삼포극장(三浦劇場)이 놀이판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오광대놀이를 위한 공동경비는 정초부터 지신밟기를 하면서 모은 돈과 특별기부금 등으로 감당했다고 한다.
○ 음악적 특징 진주오광대 연행에 사용하는 악기는 꽹과리, 징, 북. 장구 등의 농악기만으로 편성하기도 g고, 피리, 젓대, 해금 등의 선율악기를 함께 사용하는 삼현육각 혼합 편성을 하기도 한다. 공연장소의 뒤쪽 편에 앉아서 반주한다. 대개 굿거리 장단을 춤반주로 사용하고, 〈덧뵈기춤〉이 주요한 춤으로 사용된다. 장인물에 따라 오방신장의 〈진춤〉, 〈문둥춤〉, 〈중춤〉, 〈말뚝이춤〉, 〈양반춤〉, 〈팔선녀춤〉, 〈할미춤〉 등으로 불리는 춤을 춘다. 주요하게 사용되는 장단으로는 굿거리, 덧뵈기 가락, 염불, 도드리, 세마치, 타령장단 등이 있다. 염불, 반염불, 도드리 등의 장단이 오방신장무의 주요한 장단으로 사용되며, 양반ㆍ말뚝이는 물론 할미ㆍ영감의 등장에는 삼현타령이 중요한 장단으로 사용된다. 등 진주오광대에는 많은 수의 노래가 불리지 않는다. 다만 〈문둥이과장〉에서 문둥이들의 〈품바타령〉, 〈중마당〉에서 양반에게 곤욕을 치른 중의 〈신세타령〉 등이 가창 된다. 〈품바타령〉은 전형적인 장타령 류의 음악적 형식을 갖추고 연행되며, 중의 〈신세타령〉은 세마치장단으로 가창한다.
○ 절차 및 주요 내용 놀이의 구성은 다섯마당으로 짜여져 있다. 첫 번째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마당〉은 정화의 마당이다. 동방 청제장군(東方 靑帝將軍), 서방 백제장군(西方 白帝將軍), 남방 적제장군(南方 赤帝將軍), 북방 흑제장군(北方 黑帝將軍), 중앙 황제장군(中央 黃帝將軍) 등 오방신장이 각 방위를 지키는 존재들이 오수갓을 쓰고 오방색의 옷을 입고 등장해서 춤을 추면서 잡귀와 잡신들을 누르고 몰아내서 정화시킨다. 두 번째 〈문둥이마당〉은 오방색 탈을 쓴 다섯 문둥광대가 등장해서 질병을 몰아내고 안녕을 준다는 내용이다. 동방 청탈, 서방 백탈, 남방 적탈, 북방 흑탈, 중앙 황탈 등의 오방지신(五方地神)이 갖가지 병신춤을 추어서 질병을 부르는 역신(疫神)을 몰아내고 안녕과 평화를 지켜준다고 한다. 춤판과 함께 투전놀음에서 한 바탕 소동일 일어나는 내용이 전개된다. 세 번째 〈양반마당〉은 〈말뚝이놀음〉으로도 불린다. 말뚝이가 문둥광대들을 쫓아내고 하인인 말뚝이가 주인 생원과 주인의 친구인 옹생원ㆍ차생원의 무식을 비꼬며 조롱하고 부패상을 폭로한다. 양반이 진주에서 팔선녀를 모아놓고 술판과 춤판을 벌이는 것을 통해서 풍자를 보여준다.
네 번째 〈중마당〉은 파계승을 풍장하는 내용이다. 소무(小巫)가 춤을 추고 있는 곳에 상좌를 앞세운 중이 나와 춤을 추면서 소무를 유혹한다. 중은 양반들이 팔선녀와 어울려 춤추며 노는 것을 보고 세상 재미에 넋을 빼앗긴다. 중은 두 미인과 춤을 추며 놀다가 파계를 하고, 양반들이 심부름 시킨 말뚝이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룬다. 다섯 번째 〈할미ㆍ영감마당〉은 처첩간의 갈등으로 겪게되는 집안의 풍파를 다룬다. 집안을 버리고 떠돌던 생원을 생과부로 늙어버린 할미가 만나 기생첩을 두 명이나 데리고 온 영감 사이에 풍파가 일어나게 된다. 영감과 할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할미가 영감의 발에 차여 죽는다. 영감이 할미를 살리려는 갖은 노력을 다 하다가 무당의 굿으로 살려내고,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면서 놀이를 마무리 한다. ○ 등장인물과 탈 진주오광대에서 사용하는 탈은 송석하와 최상수가 수집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1934년에 송석하가 수집한 탈은 오방신장 여섯 점, 문둥이 다섯 점, 어딩이 한 점, 무시르미 한 점, 노장 한 점, 할미 한 점, 순사 겸 소무 두 점 등이다. 문둥이탈을 제외하고 종이로 만든 탈이다. 최상수가 1960년대에 수집한 탈을 오방신장 다섯 점, 문둥이 다섯 점, 옹생원 한 점, 차생원 한 점, 노장 한 점 이며 나무탈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진주오광대에서 사용하는 탈은 오방신장ㆍ문둥이ㆍ무시르미ㆍ어딩이ㆍ옹생원ㆍ차생원ㆍ할미ㆍ중ㆍ상좌ㆍ소무 등 총 스무 개 내외이다. 탈을 쓰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로는 의원ㆍ무당 등이 있고, 생원ㆍ작은마누라 등은 다른 마당에 사용한 탈을 대용한다. 현재 복원된 탈의 재료는 바가지가 대부분인데, 그 위에 종이를 여러 겹 붙여서 요철이 드러나게 하여 입체감을 내고 색을 칠한다. 오방신장탈과 포졸탈은 종이로 만든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2003) 한국의 탈춤: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2022)
진주오광대는 1920년대 말부터 조사된 연행대본 4종과 탈 수십 점이 잘 남아있는 탈놀이 가운데 하나로, 단절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대본을 통해서 지속적인 복원의 노력이 이어져 온 사례에 속한다. 영남지역 탈놀이인 오광대의 특징인 〈오방신장무〉와 〈오문둥이〉 등이 잘 드러나며, 벽산진경과 정화의 의미를 일정하게 갖추고 있다. 이와함께 양반과 말뚝이가 〈말뚝이놀이 마당〉과 〈중마당〉에 연속해서 등장하면서 과장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할미ㆍ영감마당〉에서 영감과 싸우다 쓰러진 할미를 무당의 굿으로 살려내는 것은 매우 특이한 전개라고 할 수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가산오광대와의 유사성이 확인된다. 그 외 〈말뚝이놀음〉에 등장하는 팔선녀의 춤이 진주의 교방춤과 유사하게 전개되는 점은 진주지역 문화가 배경이 되어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중마당〉에서 중이 부르는 〈신세타령〉에 세마치장단을 사용하는 점은 진주지역이 남해안 문화권이라는 지리적 특색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무형문화재 이야기 여행』, 문화재청, 2016. 『한국전통연희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014. 『한국민속예술사전: 민속극』, 국립민속박물관, 2016. 강용권, 『야류ㆍ오광대』, 형설출판사, 1977. 정상박, 『오광대와 들놀음 연구』, 집문당, 1986. 최상수, 「야유ㆍ오광대가면극, 『경상남도지』, 경상남도, 1963. 송석하, 「오광대소고」, 『조선민속』 1, 조선민속학회, 1933. 정인섭, 「진주오광대탈놀음」, 『조선민속』 1, 조선민속학회, 1933. 기사 김소현, 사진 유근종, 「예술인의 공간을 방문하다-진주오광대보존회의 공간을 방문하다」, 《진주문화관광재단 네이버 블로그》, 2022.10.31.(https://blog.naver.com/jjctf). 정원경, 「진주탈춤한마당 한번 즐겨보자」, 『경남일보』, 2014.09.05.(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749). 문화재청(www.cha.go.kr)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www.heritage.go.kr) 진주오광대보존회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jinjuogwangdae)
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