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오광대(漕倉五廣大)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에서 정월 대보름 지신밟기에 이어 연행되는 오광대 계통의 탈놀이
경상남도 낙동강 일대에서 발달한 《오광대 탈놀이》 중 사천지역의 가산리에 전하는 탈놀이다. 정월 초부터 《지신밟기》를 하고, 그 끝인 대보름날 저녁에 조창 앞마당에서 《오광대 탈놀이》를 했다. 제1과장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 제2과장 〈영노〉, 제3과장 〈문둥이〉, 제4과장 〈양반〉, 제5과장 〈중〉, 제6과장 〈할미ㆍ영감〉의 전체 6과장으로 진행되며 마지막으로 뒷풀이인 <파지굿>이 이어진다.
가산리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산리의 탈놀이 역사가 약 200~300여 년 되었다고 한다.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의 네 가지 설(說)이 전해진다. 첫째, 낙동강의 줄기인 경남 합천 초계 밤마리(율지리)에서 배워왔다는 설, 둘째, 남강 지류에 떠내려온 궤짝 안에 탈과 놀이의 대사가 적힌 두루마리 문서 및 의상과 소도구 등이 있어서 이후에 이를 활용하여 놀았다는 설, 셋째, 조창(漕倉) 지역에 큰 장에서 놀이가 시작했다는 설, 넷째, 인근 지역인 진주오광대에서 배워왔다는 설이다. 네 가지 유래설 어떤 것이 가장 유력한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 개요 [개요: 연행 목적, 주제, 배경, 시기, 장소, 주체, 용도 등]
가산리의 조창은 조선시대에 진주ㆍ곤양ㆍ남해ㆍ사천ㆍ하동ㆍ단성ㆍ고성 등 인근 7개 군의 조곡을 징수하여 서해를 통해 제물포까지 운반하던 항구였다. 이에 가산오광대를 ‘조창오광대’라고도 한다.
가산리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달에 초하룻날 당산(堂山) 천룡제(天龍祭)를 지낸다. 음력 12월 중순 경부터 마을회의를 통해 당산제를 준비하고, 정월초하루 당일에 당산 천룡제를 지낸 후 방갈샘과 너머샘에 그리고 마을 입구 벅수에 제를 지낸다. 천룡제를 마친 2일부터 14일까지는 마을 매구꾼(농악패)들이 마을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지신밟기》를 여러 날 동안 진행하며, 그 마지막에 오광대를 연행한다.
정월대보름날 초저녁에는 오광대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조창오광대’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말뚝이, 양반, 무당, 농악대의 순서대로 마을을 도는 길놀이를 한다. 이후 조창 앞마당에서 오광대를 논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까지는 16일에 마을 대동회를 열었다고 한다. 《지신밟기》와 《오광대놀이》에서 발생한 수익은 마을대동회를 통해 정산해서 마을의 공동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마을공동자금의 활용의 사례로 일제강점기에 3ㆍ1 운동 이후 야학을 건립해서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정월대보름 이후에는 마을 놀이패들이 구해창, 제미창, 사남면, 초전리, 용해면, 선진리, 사천읍, 곤양면, 한덕, 곤면, 완사 등의 인근 지역으로 공연을 다녀왔다고 전한다.
○ 절차 및 주요 내용 전체 6개의 과장으로 구성되며, 제1과장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 제2과장 〈영노〉, 제3과장 〈문둥이〉, 제4과장 〈양반〉, 제5과장 〈중〉, 제6과장 〈할미ㆍ영감〉의 순서로 진행된다. 제1과장 〈오방신장무(오방신장마당)〉에서는 중앙황제장군(양반)을 중심으로 동방청제장군ㆍ서방백제장군ㆍ남방적제장군ㆍ북방흑제장군이 벽사의식무를 춘다. 이때 오방신장은 서울에서 유람하러 내려온 양반으로 설정된다. 제의적 탈놀이가 오락적 탈놀이로 변모하는 중간 단계가 확인된다. 제2과장 〈영노(영노마당)〉는 사자 모양의 영노가 ‘비-비’소리를 내며 등장하여, 양반(오방신장)을 잡아먹고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 황제장군을 잡아먹는다. 포수의 등장 이후 영노는 포수와 대치하다가 총에 맞아 죽게 된다. 이는 《통영오광대》의 〈사자무과장〉과 유사하다. 제3과장 〈문둥이(문둥이마당)〉는 절름발이, 입찌그랭이, 곰배팔, 언챙이, 코빠진놈의 다섯 문둥이가 등장해서 비참한 생활상을 표현한다. 눈ㆍ코ㆍ귀ㆍ입ㆍ팔ㆍ다리 등이 심하게 상한 문둥이의 형상을 보여주고 〈병신춤〉과 〈장타령〉을 부르거나 투전을 한다. 투전판에서는 어딩이가 개평을 갖겠다는 고집을 부리다가 얻어맞는데, 화가 난 어딩이가 고발을 하게 된다. 이후 곧 포졸이 문둥이를 모두 잡아간다. 제4과장은 〈양반(양반마당)〉은 말뚝이가 재담으로 양반을 희롱한다. 양반과 두 아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있을 때 하인인 말뚝이가 문안을 드린다면서 양반을 돼지에 비유하고, 양반의 마누라를 배 위에 싣고 더덩실 춤을 추는 등의 행위로 양반을 모독한다. 말뚝이의 외설스러운 말을 통해 양반의 허위의식과 무능력을 폭로한다. 제5과장 〈중(중마당)〉은 파계승을 고발하는 것이다. 노장이 양반의 애첩인 서울애기를 유혹해서 업고 달아난다. 양반들은 말뚝이에게 노장을 잡아오라고 명을 내리고, 잡혀 온 노장을 매를 때린다. 노장은 〈음양타령〉과 여러 단가를 부르며 신세한탄을 하고, 굴갓ㆍ염주ㆍ죽장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면까지 벗고 승려 생활을 그만둔다. 제6과장 〈할미ㆍ영감(할미ㆍ영감마당)〉은 헤어졌던 영감과 할미가 다시 만나는 내용이다. 헤어졌던 영감은 서울애기를 첩으로 데리고 나타나고 할미는 아들 마당쇠를 데리고 들어와 외설스러운 대화를 주고받는다. 영감과 할미는 재산 분배를 놓고 집안 물건을 부수다가 조상단지를 깨어 동티가 나서 영감이 쓰러진다. 옹생원을 불러 독경을 해도 효험이 없어 죽게 되며, 무당을 불러 《오구굿》을 한다. 모든 놀이를 마치면 연희자와 관객이 어우러지는 ‘《파지굿》’에서 춤이 펼쳐진다. 이때 대동놀이로 〈덧배기춤〉이 추어진다.
○ 음악적 특징 가산오광대는 매구패 즉 꽹과리(쇠), 징, 북, 장구가 반주를 맡는다. 이 가운데 태평소와 징은 《파지굿》에서 〈덧뵈기춤〉을 출 때만 사용된다.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타악기만을 사용하여 3소박 4박의 굿거리장단을 중심으로 반주하는 특징이 있다. 《파지굿》의 춤 반주로 사용하는 굿거리장단은 경상도지역 〈덧뵈기춤〉의 독자적인 맛을 표현하므로 덧뵈기장단이라고도 부른다. 굿거리장단의 세 번째 박을 강하게 연주하여 어깨춤의 느낌을 살리며, 춤에 따르는 장단의 특징을 보여준다. 가산오광대 연행 중에 가창하는 노래로는 삽입가요와 등장인물의 상황에 맞게 짧게 가창하는 노래로 구분할 수 있다. 삽입가요로는 〈문둥이과장〉에서 문둥이들이 교환창으로 부르는 〈장타령〉과 합창으로 부르는 〈투전불림〉이 있다. 또한 〈중과장〉에 중이 〈농부가〉ㆍ〈진농부가〉ㆍ《춘향가》ㆍ《심청가》ㆍ〈소상팔경〉 등을 가창한다. 이때는 대개 〈진농부가〉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할미ㆍ영감마당〉에서 죽은 영감을 살리기 위해 옹생원이 부르는 〈불성명당신조경〉과 《오구굿》을 하는 무당들의 굿소리와 염불 등이 있다. 삽입가요의 경우 장타령은 메나리토리로 부르며, 농부가와 판소리 등에는 판소리 계면조가 사용된다. 옹생원의 독경은 북 반주의 읊는 소리가 사용되며, 오구굿에서는 염불이라 부르는 ‘나무아미타불’의 상여소리 계열 노래를 부른다. 춤은 〈덧뵈기춤〉이 주로 쓰이는데, 장단은 굿거리가 주로 사용되고 자진모리장단과 타령장단 또한 다수 구성된다.
○ 복식·의물·무구 등장인물은 황제장군, 동방청제장군, 북방흑제장군, 서방백제장군, 남방적제장군, 영노, 양반(영감 겸용), 작은 양반들 2명, 말뚝이, 문둥이 1(도문둥이, 절름발이), 문둥이 2(입찌그랭이, 곰배팔이), 문둥이 3(코빠진놈), 문둥이 4(눈찌그랭이), 문둥이 5(귀빠진 놈), 어딩이, 손님하는 아이, 중(노장), 상좌, 서울애기(서울댁), 소무, 할미, 마당쇠, 옹생원(봉사 1 겸용), 봉사 2, 큰무당, 작은 무당들(오무당), 포수, 몰이꾼, 의원이다. 탈은 종이, 대나무, 바가지의 세 가지 재료로 만들며 대체로 종이로 만들어진 것을 사용한다. 총 32개의 탈이 있는데, 바가지탈 7개와 대나무로 만든 영노탈 외에는 모두 종이탈을 사용한다. 종이탈을 두터운 평면의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얼굴 모양대로 잘라 그 중간을 접어 만든다. 옹생원 탈과 봉사탈은 혼용한다. 탈춤을 끝낸 후에도 탈은 계속 보존해서 사용했고, 상한 탈은 고쳐서 활용했다. 탈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고, 모든 연행자가 함께 참여했다. 1974년 복원 당시 순사, 포수, 몰이꾼, 의원, 대잡이의 배역은 탈을 쓰지 않았으나 현재 모두 탈을 만들어서 쓴다. 매구패는 흰색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삼색 꽃을 올린 고깔을 쓴다. 황제장군, 동방청제장군, 북방흑제장군, 서방백제장군, 남방적제장군은 각각 상징하는 색깔의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짧은 지전을 들며, 탈 위로 대나무로 만든 장식을 쓴다. 영노는 사자처럼 털옷을 입는다. 포수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총을 든다. 문둥이는 여러 천을 덧대어 꼬맨 낡은 옷을 입고, 어딩이는 흰색 바지와 저고리를 입는다. 중은 굴갓을 쓰고, 승복인 가사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염주를 목에 건다. 상좌 역시 승복과 같은 색의 옷과 고깔을 쓰고 바랑을 짊어진다. 양반들은 흰 도포, 큰양반은 노란 도포에 지팡이를 짚는다. 말뚝이는 검은 쾌자에 삼색띠를 두른다. 작은 무당은 색동이 들어간 한삼에 붉은 천으로 허리를 묶고, 흰 고깔을 쓴다. 서울애기는 녹의홍상을 입는다. 할미는 흰 치마와 저고리에 긴 담뱃대를 들고 다니며, 오강과 물레를 소품으로 사용한다. 영감은 흰 바지 저고리를 입고 바지는 무릎 아래까지 걷어 올린다. 봉사는 흰 도포에 지팡이를 짚고 북과 북채를 한 쪽 어깨에 매고 등장한다. 마당쇠는 흰 바지 저고리를 입고, 옹생원은 흰 도포를 입는다.
○ 역사적 변천 및 현황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오광대놀이》의 전승이 중단되었으나 천룡제와 《지신밟기》 전통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1년에 부산지역 민속학자 강용권(康龍權)이 ‘가산오광대연희본’을 채록하였는데, 이후 이를 바탕으로 1974년 서강대 민속문화연구회에서 가산 주민들과 함께 복원에 착수하였다. 복원과정에서 여러 차례 채록본이 정리되어 일정한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상에서의 큰 변화는 없으나 한자 고사성어 사용에 대한 문제, 지역 발음을 표준어로 표현하는 문제 등이 발생하였다. 가산오광대 연희본으로 『강용권 본』(1971 채록), 『서강대 민속문화연구회 본』(1974년 채록), 『이두현 본』, 『탈춤대사집 본』(연행본), 『전경욱 본』 등이 있다.
가산오광대는 경상남도 지역 오광대와 야류의 가장 오래된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오방신장무〉에서 의식무의 역할을 한 다는 점, 〈영노과장〉에서는 영노가 사자의 형상을 하여 사자춤을 대신하고 있는 점, 〈문둥이과장〉에 절름발이, 입찌그랭이, 곰배팔, 언챙이, 코빠진놈 등 다섯 명의 문둥이가 등장하는 점, 다섯명의 무당이 《오구굿》을 하는 점, 뒷풀이로 ‘《파지굿》’이 있어서 흥겨운 대동놀이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지역과 다른 차별점이다. 또한 〈할미ㆍ영감과장〉에서 두 사람의 갈등의 결과로 영감이 죽는 결말로 내용이 설정되어 있는 점은 가산오광대와 《김해오광대》에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가무형문화재(1980) 경상남도 무형문화재(1974) 한국의 탈춤: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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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