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젊었을 때 여러 산을 다니다가 다행히 관음사(觀音寺)에 도착하여 원로 스님에게 이 절의 신성한 사적(事蹟)에 대해 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 어떤 장님이 있었는데 성은 원(元)이고 이름은 량(良)이었다. 일찍이 배우자를 잃고 홀아비로 가난하게 살았으며 친척도 드물어 의지할 곳이 없었다.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홍장(洪莊)이었다.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아름다워 태도가 평범하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영민하였으며 항상 지극정성으로 장님 아버지를 봉양하였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효도하였으며 잠시도 잊지 않았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곁에서 모셨을 뿐 아니라 의복 공급이나 음식 맛 하나하나 아버지 뜻에 맞지 않게 함이 없었다. 인근의 사람들이 모두 큰 효녀라고 일컬었으며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장님 아버지가 마침 일이 있어 마을에 외출했다가 길에서 한 스님을 만났는데, 홍법사(弘法寺) 법당 건축의 책임을 맡은 성공(性空)이었다. 문득 장님을 보자 달려와 절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와 함께 금강석(金剛石)과 같은 불후의 인연을 이루고자 합니다. 공께서는 저를 위해 크게 시주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장님이 말하기를 “나는 가난해서 빌어먹는 처지인데 그와 같은 소원을 바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성공이 다시 절하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제가 권축(勸軸, 사찰 건립과 관련된 기록) 권선문(勸善文)을 받던 날에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저에게 ‘내일 아침 길에 나서면 장님을 만날 텐데 그가 바로 큰 시주자이니라.’라고 하였으므로 간청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님은 한동안 곰곰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집 안에는 한 말 쌀이 없고 들에는 한 자 땅이 없다. 하고 싶은들 어찌 하겠는가. 다만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를 줄 것이니 팔아서 법당 지을 비용을 만들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당시 소녀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성공이 이별을 고하고 딸을 데려갔다. 딸과 아비만 슬퍼한 것이 아니라 산천도 색이 바래졌고 해와 달은 빛을 잃었고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부짖었고 도로에서 이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가슴 저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딸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길을 가다가 몸과 마음이 지쳐 소랑포(蘇浪浦) 해안에 쉬었다. 머리를 들어 서쪽 멀리 바라보니 순식간에 푸른 바다 위로 두 척의 붉은 배가 서쪽에서 다가오는데 빠르기가 화살 같았다. 포구에 정박했는데 중국 연인(涓人)의 배였다. 배 위에서 금관옥패(金冠玉佩)에 비단옷을 입은 사신(使臣)이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눈여겨 자세히 보더니 일어나 그 앞에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황후마마십니다.”라고 하자, 소녀가 놀라 말하기를 “무슨 말씀인가요?”라고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는 진(晉)나라 사람입니다. 영강(永康) 정해년(丁亥年) 5월 신유일에 황후께서 붕어하셨습니다. 이로부터 황제의 슬픔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꿈에 신인이 나타나 황상께 말하기를 ‘새 황후는 동국(東國)에서 태어나 지금 장성하여 단정하기가 예전 황후보다 나으니 더 이상 죽은 사람 때문에 슬퍼하지 마시오.’라고 하니, 황상께서 기지개를 켜고 하품하면서 깨어나셨습니다. 이튿날 바로 비단 4만 필과 금은보화를 배 두 대에 가득 싣게 하고 관상을 잘 보고 지혜로운 자를 가려 사신으로 삼고 곧바로 동국으로 달려가 이러이러한 사람을 구해 오라고 거듭 명하였습니다. 소신이 외람되이 이 임무를 가지고 명령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근심하였는데 오늘 다행히 존안을 뵙게 되어 이렇게 사실을 말씀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소녀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훈(塤)과 지(篪)의 악기가 서로 호응하듯이 하니 이 한 몸이 가고 말고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가져온 폐백이 얼마나 되는지요?”라고 하자, 사신이 대답하기를 “배 두 대에 금은보화가 가득 실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소녀가 미소 지으며 말하기를 “제 몸은 저만의 몸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남을 위해 착한 일을 하라고 준 재화이니 배 두 대에 실린 물건은 화주승 성공에게 넘겨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드디어 날을 헤아려 함께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 조정에서 알현할 때 달덩이 같은 외모와 별빛 같은 눈이 눈부시게 사람들을 비추었다. 황제가 보고서 감탄하며 말하기를 “바다 구석의 동쪽에 이런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이로부터 총애하여 말만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황후는 품성이 우아하고 선량하여 자비와 위엄이 하늘까지 뻗쳤다. 정토의 업을 닦고자 하여 석공에게 명하여 마노(瑪瑙) 탑 3천 개를 만들어 여러 나라에 나눠 주게 하였다. 황후가 말하기를 “내가 보위에 올랐지만 모국을 어찌 잊을까.”라고 하면서 또 53불(佛), 500성중(聖衆), 16라한(羅漢)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점검을 마치자 뱃사람으로 하여금 배 세 척에 실어 모국으로 보내게 했다. 바다를 항해 중인 배는 노를 젓지 않고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가고자 하는 대로 맡겨두자 감로사(甘露寺) 앞 포구에 닿았으며 이에 이 절에 봉안하고 돌아갔다. 석공은 늙었으나 소원이 커서 자기 아들을 시켜 탑을 만들게 하여 금강사(金剛寺)에 옮겨 안치토록 했고, 네 번째 탑은 풍덕현(豐德縣) 경천사(擎天寺)로 옮겨 세워두었다. 황후는 또 평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풀고 싶어서 말하기를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데 내가 어찌 성의를 표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불상과 석탑을 정치하게 만들어서 대흥현(大興縣) 홍법사(弘法寺)에 안치하게 했다. 이와 같이 오가기를 다섯 차례나 하면서 공덕이 원만해지고 소원이 모두 이루어졌다. 하지만 빠진 것은 자신의 원불이었다. 이에 별궁(別宮)으로 가서 석공을 불러 관음보살 한 분을 조성하고는 사람을 시켜 석선(石船, 돌을 실어 나르는 배)에 싣게 하여 동국으로 보냈다. 배가 떠나기에 앞서 황후가 거듭 명하기를 “이 불상은 배가 멈추는 곳에 봉안하도록 하라.”고 하자, 명을 받은 사람은 동국으로 향하여 바다 위를 항해하였다. 기약한 날이 되자 어느 날 아침 홀연 낙안(樂安) 지단교(地斷橋) 가까이에 정박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이 지역의 수졸이 황당선(荒唐船, 정체불명의 외국 배)으로 의심하여 서둘러 따라 잡았다. 때 마침 이 석선은 바람도 없는데 절로 움직여 먼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이튿날 옥과현(玉果縣) 처녀 성덕(聖德)이 뜬금없이 바닷가에 나타나 홀로 서서 멀리 바라보니 하늘과 바다가 물결치는 아득한 곳에 작은 석선 한 척이 무슨 물건을 끌고 오는 듯하였다. 성덕이 조심스럽게 배 위에 올라 보니 황금 관음상이었다. 홀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 오체투지 절하기를 마치고 직접 관음상을 등에 짊어지었는데 가볍기가 기러기 털 같았다. 그런데 이 고개에 이르자 관음상이 태산처럼 무거워 한 발짝도 옮길 수가 없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그 자리에 관음상을 안치하고 이어서 큰 절을 세웠다.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라 이름 지은 것은 참으로 이런 까닭이 있는 것이다. 홍장과 성덕은 모두 관음보살께서 그들의 능력에 따라 나타난 몸이었던가. 석가모니의 분신이 무량한 세계에 중생을 위해서 나타난 것인가. 그 당시 화주승 성공은 재물을 얻고 나서 한 달을 넘기기 전에 법당을 완공했다. 장님 원량은 그 전부터 딸과 헤어진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는데 문득 눈이 밝아져 큰 복을 누리고 죽었는데 95살이었다. 이는 모두 관음보살이 감동하며 도움을 준 자취이니 사라져 버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원로 스님에게 들은 것은 여기에서 그친다.
출처 : <옥과현성덕산관음사사적(玉果縣聖德山觀音寺事蹟) >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 《심청가》의 주요 대목과 유파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소개된《심청가》의 더늠은 다음과 같다. 김채만의 ‘초앞(삯바느질)’, 김제철의 ‘심청탄생’, 백근용의 ‘곽씨부인장례(상여치레)’, 주상환의 ‘젖동냥’, 최승학의 ‘심청의 동냥 자청’, 정창업의 ‘중타령’, 이창윤의 ‘부녀이별’, 전도성의 ‘범피중류’, 정춘풍의 ‘소상팔경가’가 그것이다. 이러한 더늠은 주로 《심청가》의 전반부에 집중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심청가》 후반부의 음악은 후대에 짜여졌음을 알 수 있다. 후반부의 주요 대목으로는 송천자가 부르는 ‘화초타령’이 있는데 이 대목은 18세기 명창인 우춘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 ‘추월만정’ 대목은 일제강점기 이화중선이 불러 인기가 높았다고 전해진다. ‘뺑덕어미 행실’, ‘방아타령’, ‘부녀상봉’, ‘심봉사 눈 뜨는 대목’ 등도 후반부 주요 대목으로 알려져 있다. 《심청가》를 잘 불렀다고 기록된 명창으로는 순조대의 김제철, 철종 때의 박유전과 이날치, 주상환, 전해종, 정창업, 최승학, 김창록이 있으며, 고종대의 황호통, 이창윤, 배희근, 김채만, 정재근, 송만갑, 이동백, 정응민 등이 있다. 이 명창들은 동편제ㆍ서편제ㆍ중고제를 막론하고 있어서 어느 유파에서나 《심청가》를 장기로 삼은 명창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심청가》는 동편제 계열에서는 송흥록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송만갑, 강도근 등으로 이어져 불렸으나 현재는 전승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박록주가 《심청가》를 잘 불렀다고 전해지며, 김소희의 《심청가》에 송만갑의 영향이 있다. 박유전이 창시한 서편제와 강산제 계열에서는 모두 《심청가》가 전승되었는데, 서편제 유파는 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한애순·장월중선-정순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유파를 ‘박동실제’로 부르기도 한다. 서편제 《심청가》는 고졸하고 애상적인 느낌이 강한 반면, 후기에 정립된 강산제에서는 유가적 품위를 강조하고 비극적 미의식을 절제했다. 강산제 《심청가》는 박유전-정재근-정응민-성창순·조상현 등으로 전승되어 내려왔다. 이 유파를 ‘정응민제’로 부르기도 한다. 1960년대 이후로는 무형유산 제도가 생기면서 여러 소리를 바탕으로 새롭게 짠 바디가 생겨났다. 중고제 《심청가》는 박동진에 의해 전승되었다. 박동진은 중고제 김창진 명창에게 《심청가》를 배워 자신의 소리로 다시 짰다. 박동진제 《심청가》는 김양숙에게 전승되고 있다. 김연수제(동초제) 《심청가》는 김연수-오정숙-이일주-장문희·송재영으로로 전승되고 있다. 김소희제(만정제) 《심청가》는 신영희, 안향련, 안숙선 등에게 전승되었으나, 현재 전승이 활발하지 않다. 현재 전해지는 서편제(박동실제), 강산제(정응민제), 동초제(김연수제) 《심청가》를 볼 때 장단 중 진양조와 중모리의 사용 빈도가 높은 것을 보아 《심청가》가 비장감에 큰 비중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단 구성으로는 강산제가 원박을 중심으로 하여 장단을 짜 나갔음에 비해 서편제는 원박에 자진(장단이나 늦은) 장단을 덧붙여 빠르기를 조절하고 있으며, 동초제는 사설의 확대에 따라 가장 많은 장단의 가짓수를 가지고 장면의 전환마다 장단의 잦은 교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 강산제는 세련된 문체의 사설과 더불어 장단에도 극적 전환을 중요시하였고, 특히 메나리조, 덜렁제, 우조 등의 다양한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서편과 동편을 융합하고자 하였다.
최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