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고성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하는 오광대 계통의 탈놀이
조선 후기 경상남도 낙동강 유역에 전해지던 〈오광대놀이〉의 영향을 받은 탈놀이를 고성 지방 남촌의 한량들이 중심이 되어서 연행한 것이다. 고성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북춤마당〉, 제2과장 〈오광대마당〉, 제3과장 〈비비마당〉, 제4과장 〈승무마당〉, 제5과장 〈제밀주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반이 다수 등장하고, 벽사의식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고성오광대의 시작에 대한 확실한 고증은 어렵다. 낙동강 유역의 여러 오광대 중 고성오광대의 발생은 합천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밤마리 대광대패는 유랑예인집단으로 추정되는데, 통영오광대ㆍ창원오광대 등에 영향을 미쳤고, 고성오광대 역시 그 영향 아래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고성 읍내 풍류모임인 북촌파와 남촌파가 있었는데, 북촌파는 무랭이(현재의 무량리) 박씨 문중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비교적 부유층인 선비들이 악기와 오음육률로 소일하던 이들이었고, 남촌파는 남촌(현재의 남외마을) 천씨 문중의 서민층 한량들이 사랑방을 중심으로 주로 시조창과 매구놀이(농악)를 즐기며 소일하던 이들이었다. 남촌파는 고성지방에 떠도는 괴질로 무이산(청량산)으로 피병을 갔는데, 그때 시조 등과 함께 〈오광대놀이〉를 놀았다고 전한다. 고성 오광대는 조선 후기에 남촌파 선비 중 이윤희, 정화경(鄭華景), 그리고 김창후(金昌後, 1887~1965) 외 15~16명의 젊은이들이 주요 활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개요
고성오광대는 주민들이 조직한 일심계(一心契)의 계원을 중심으로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연행한다. 일심계는 음력 정초부터 도독골 산기슭에 모여서 연습을 약 일주일간 진행한다. 이후에 지신밟기를 해서 공동경비를 모은다. 음력 정월 보름날 저녁에 이르면 장터 또는 무량리 잔디밭, 밤내, 객사 마당에서 장작불을 피워놓고 놀이를 하였다. 이때 앞놀이에 해당하는 걸립을 놀기도 했다. 무대는 특별한 장치가 없이 넓은 공간을 활용해서 연행하였다. 연희자는 일심계(一心契)의 계원이며, 연장자가 전체 놀이를 주관한다.
○ 절차 및 구성
고성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북춤〉, 제2과장 〈오광대놀이〉, 제3과장 〈비비과장〉, 제4과장 〈승무과장〉, 제5과장 〈제밀주과장〉의 총 다섯 과장으로 구성된다. 내용은 민중의 삶의 모습을 반영,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와 첩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제1과장 〈문둥북춤〉은 문둥이가 신명으로 삶을 극복하는 내용이다. 양반의 자손이지만 조상들의 누적된 죄업으로 문둥병에 걸린 문둥이가 춤을 통해 이를 극복하여 새 삶을 찾는다. 여러 동작은 슬픔과 기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과거 단순한 문둥이를 형상하는 춤에서 1980년대 이후에는 농사짓는 모습, 수확하는 모습, 수확된 곡식(보리)을 갈아서 바람에 날려 깍지를 버리고 먹는 모습, 손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어르는 모습, 잡은 파리를 입에 넣는 모습, 코를 푸는 모습 등을 구체화해서 보여준다. 문둥북춤은 천형의 한을 드러내는 슬픔의 춤인 전반부와 북과 북채를 쥔 채 한을 승화하는 기쁨의 춤이 후반부로 구분할 수 있다.
제2과장 〈오광대놀이〉는 마부인 말뚝이가 양반을 조롱하는 대사를 주고받으며 양반과 어울려 춤을 추는 과장이다. 1970년대 이전에는 원양반 한 명, 젓양반(곁양반) 두 명, 양반 세 명이 등장했으나 요즘은 중앙황제양반ㆍ동방청제양반ㆍ서방백제양반ㆍ남방적제양반ㆍ북방흑제양반 다섯 명과 홍백양반ㆍ종가도령 등 총 일곱 명이 등장한다. 양반 중에는 중앙황제양반이 전체를 주도한다. 배김새의 반복이 〈양반춤〉의 특징이다. 양반들과 말뚝이가 어우러지면서 추는 배김새는 힘차면서도 조화롭다. 〈말뚝이춤〉은 〈양반춤〉보다 보폭이 크고 고개 사위도 크다.
제3과장 〈비비과장〉은 무엇이든 잘 잡아먹는 상상의 동물 비비가 등장하는데, 영노라고도 한다. 영노는 일명 비비새라는 이름 외에도 비비초촐이라고도 하는데 입에서 “비-비”하고 소리를 낸다. 다른 지역 오광대의 영노마당에 해당한다. 비비가 양반을 만나 무엇이든지 잘 잡아먹는다며 양반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한다. 양반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양반의 신분을 강조하지만, 비비는 양반은 더 잘 잡아먹는다고 한다. 그러자 양반은 너의 할배라고 해서 위기를 모면하고, 비비에게 욕만 얻어먹는다. 제4과장 〈승무과장〉은 스님이 세속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선녀(다른 가면극의 소무)의 유혹에 빠져 파계하는 내용이다. 선녀가 춤을 추고 있으면 승려가 등장해서 선녀를 유혹한다. 대사가 없고 승려의 춤 위주로 진행한다. 제5과장 〈제밀주과장〉은 제밀주(첩, 작은어미), 큰어미(할미), 시골영감 사이의 갈등이 그려지는 내용이다. 큰어미는 물레를 잣는 등 평생을 가사노동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시골영감이 가출했다가 귀가하면서 첩(제밀주)을 데리고 들어온다. 곧이어 제밀주가 낳은 아이를 큰어미가 떨어트려 죽게 만든다. 화가 난 제밀주가 큰어미를 떠밀어 죽게 하고, 큰어미의 상여가 나간다.
○ 악가무특징 고성오광대는 농악 악기인 호적, 꽹과리, 징, 장구, 북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거에는 삼현육각 반주를 썼다고 하나 그 형태가 명확하지 않으며, 농악대의 반주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악사는 놀이마당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선 자세로 연주한다. 연행시 별도의 반주곡을 따로 두고 있지 않으며, 대체적인 모든 춤의 반주 장단으로 3소박 4박의 굿거리 장단이 사용되는 점이 경상도 일대 오광대 및 야류의 형태와 유사하다. 다만 〈문둥북춤〉은 덧뵈기-굿거리-덧뵈기장단으로 반주한다. 예전에는 구음 반주도 곁들여졌으나 현재는 반주만 진행한다. 고성오광대는 탈놀이 가운데 노래 가창이 매우 적은 편에 속하여, 삽입가요나 등장인물의 자기소개 등의 노래가 없다. 다만 제5과장 〈제밀주과장〉에서 큰어미(할미)가 죽게되자 동네사람들이 나와서 상여놀이를 할 때 〈상여소리〉를 가창한다. 이는 전형적인 고성지역의 상여소리를 반영하고 있다. 황봉사의 염불로 〈정구업진언〉 〈신묘장구대다리니〉 등이 가창되지만 전통적인 사설과 달리 놀이의 내용에 따라 변형된 사설로 가창된다. 고성오광대에는 춤을 중심으로 하는 장면이 많다. 따라서 기본 춤사위인 배김새를 비롯한 다양한 춤사위가 사용되며 이것이 명인들에 의해서 잘 정리되어 있다. 현재 전수하는 기본 춤사위는 고산 허종복 선생의 춤과 예술 안목으로 정묘하게 연출하여 다듬은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고성오광대의 기본동작은 큰걸음사위, 작은걸음사위, 사방치기 그리고 가위사위로 구분한다. 배역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춤으로 잘 표현하도록 한다. 말뚝이 춤은 동작이 크고 도약이 많으며, 〈양반춤〉의 배김새는 유연한 춤사위로 표현한다. 문둥이춤은 문둥이가 파리 잡아먹는 모습 등 문둥이의 생활동작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제밀주와 소무의 춤은 맵시를 부리는 여성춤으로 남성 연희자가 배역을 맡는다. 할미춤은 팔을 크게 벌리고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며 외설적인 동작으로 인물의 특성을 익살스럽게 나타내는 형태이다. ○ 복식·의물·무구 고성오광대는 문둥이춤ㆍ오광대춤ㆍ중춤ㆍ비비춤ㆍ제밀주춤의 5마당으로 구성되며, 문둥이ㆍ말뚝이ㆍ원양반ㆍ청제양반ㆍ적제양반ㆍ백제양반ㆍ흑제양반ㆍ홍백양반ㆍ종가도령ㆍ비비ㆍ비비양반ㆍ중ㆍ선녀(각시)ㆍ시골양반(영감)ㆍ큰어미(할미)ㆍ제밀주(작은어미)ㆍ마당쇠 등 총 열아홉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탈은 문둥이, 원양반, 청제양반, 적제양반, 백제양반, 흑제양반, 홍백양반, 도령, 말뚝이, 비비, 중, 선녀(2개), 시골양반, 큰어미, 제밀주, 마당쇠, 봉사, 상주 등 모두 17종이다. 조선 후기에는 탈을 나무로 만들어서 썼다고 하지만, 광복 이후에는 마분지를 짓이겨서 종이탈을 만들어 썼었다. 일부 가면을 나무탈로 바꾸어서 만들어서 사용하는데, 다른 지방에 비해 극채색(極彩色)을 많이 쓰며 사실적으로 만들어서 쓴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탈을 쓰나, 봉사ㆍ상주ㆍ상두꾼은 탈을 쓰지 않는다. 말뚝이는 검정 덧걸이를 입고 허리에 붉은 띠를 둘렀으며 머리에 패랭이를 썼는데, 패랭이에 달린 끈은 붉은 색과 흰색 실을 꼬아 만든 것이다. 손에는 말채를 들었고, 말채 끝에 말총이 달려 있다. 양반은 각각 방위를 나타내는 색의 도포를 입고 관을 썼으며 대부분 맨손이지만 황제양반은 부채나 지팡이를 짚는다. 홍백양반은 도포의 절반은 붉은 색, 절반은 흰색이며, 종가도령은 도령복을 입는다. 비비는 뿔이 달린 동물형상이므로 의상 역시 통으로 상하의가 연결된 얼룩덜룩한 무늬의 옷이며 꼬리가 달려 있다. 비비양반은 흰 도포에 관을 썼다. 중은 승무 복장처럼 긴 한삼이 달린 옷에 흰 고깔을 쓰고 한 쪽 어깨에 붉은 띠를 매었다. 선녀는 파란 쾌자를 입고 붉은 치마에 한삼을 손에 쥐었다. 큰어미는 허리를 드러낸 흰저고리와 치마에 허리춤에 봇짐과 짚신을 달고 물레를 소품으로 사용한다. 봉사는 흰도포에 지팡이를 짚었으며 검정 패랭이를 썼고, 북과 꽹과리를 독경때 사용한다. 제밀주는 노랑저고리 붉은 치마이며 제밀주가 낳은 아이는 나무로 깎은 인형이다.
○ 역사적 변천 과정 1920년대에 고성오광대가 현재와 유사한 형태의 짜임새를 갖게 된다. 1920년 정화경, 이윤희 등의 명인에게서 김창후, 홍성락(洪成落, 1887~1970), 천세봉(千世鳳, 1872~1967) 등으로 전승이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전승이 약화되었다가 해방 이후 다시 오광대 모임을 규합하였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가야극장 낙성식 기념공연으로 고성〈오광대놀이〉가 공연되었다. 당시 공연 장면이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 현재와 온전히 같은 모습의 형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에 천세봉 연희자가 정리한 연희본을 필사한 『단가초』에 오광대 『홍유순서급자답』을 기록한 학자들이 남기면서 문서로 정리되는 성과를 남겼고, 1956년에 이르러 고성오광대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재건 노력을 펼친다. 이후 1960년대 들어서서 민속학자 정상박이 대본을 채록하고, 이두현 등이 조사를 하면서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성오광대는 다른 지방의 오광대에 비해 놀이의 앞뒤에 〈오방신장춤〉, 〈사자춤〉 같은 귀신 쫓는 의식춤이 없고, 오락성이 강한 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7개의 양반탈이 등장하므로, 통영오광대와 함께 우리나라 가면극 가운데 가장 많은 양반탈이 등장한다. 반면 야류와 오광대와 비교할 때 말뚝이의 역할이 약화되어 있으며 양반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점 또한 차별적이다. 고성오광대에는 삽입가요는 적지만, 춤이 많고 춤사위가 잘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국가무형문화재(1964) 한국의 탈춤: 인류무형문화유산(2022)
『고성오광대 전수대사본』, 고성오광대보존회, 2017. 『무형문화재 이야기 여행』, 국가유산청, 2016. 『(중요무형문화재) 탈춤대사집』, 한국문화재보호협회, l981. 『한국전통연희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014.
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