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才人), 우인(優人), 창우(倡優), 배우(俳優)
전통 사회에서 음악, 곡예, 민속극 등을 전문적으로 연행했던 민간 연희자 또는 예인
광대는 전통 사회에서 악기 연주ㆍ판소리 같은 음악이나 줄타기ㆍ땅재주ㆍ솟대타기 같은 곡예, 가면극ㆍ인형극 같은 민속극 등을 전문적으로 연행했던 민간 연희자 또는 예인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국가 차원의 공적 연희, 민간 차원의 사적 연희에 참여하거나 유랑 집단을 형성해 판을 벌이는 등의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대대로 이어온 전문 기량을 바탕으로 국악 발전에 기여했다.
전통 사회에서 전문적으로 연희를 담당했던 연희자나 예인에 대한 호칭은 광대(廣大)ㆍ재인(才人)ㆍ우인(優人)ㆍ창우(倡優)ㆍ배우(俳優)ㆍ영인(伶人)ㆍ희자(戱子)ㆍ창부(倡夫)ㆍ공인(工人)ㆍ악공(樂工)ㆍ정재인(呈才人)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대체로 그들의 역할이나 직업능력에 따라 붙여진 것이며, ‘광대’나 ‘재인’은 이 가운데 비교적 공식화된 용어에 해당한다. 광대는 본래 가면(假面) 또는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연희자를 폭넓게 가리키는 말이었다. 문헌에 나타난 용례를 살펴보면,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나례가(儺禮歌)」(1504)에서는 ‘가면’을, 『훈몽자회(訓蒙字會)』(1527)에서는 괴뢰(傀儡) 즉 ‘꼭두각시놀음의 인형’을 지칭하며, 『역어유해(譯語類解)』(1690)에서는 ‘가면’을 가리키는 말로 풀이하되 목우(木偶)와 가면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는다. 『고려사(高麗史)』 「전영보전(全英甫傳)」(1451)에 광대를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사람(假面爲戱者)’이라고 한 데서는, 광대라는 말의 쓰임이 가면 자체를 가리키던 데서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연희자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현전하는 가면극인 《하회별신굿탈놀이》의 ‘각시광대’나 ‘양반광대’와 같은 용어에서도 광대가 해당 역을 맡은 가면극 연희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이 확인된다. 이처럼 주로 가면극이나 인형극과 관련하여 사용되던 ‘광대’라는 말은 이후 줄타기ㆍ땅재주ㆍ솟대타기 같은 곡예, 악기 연주ㆍ판소리 같은 음악 등을 전문적으로 하는 연희자까지 아울러 지칭하게 되었다. 유사한 용례로, 호남 지역의 농악에서 잡색(雜色)이 쓰는 가면이나 잡색을 ‘광대’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북방 민족 계통의 수척(水尺), 재승 계통의 연희자, 서역 계통의 연희자가 전통연희를 담당했는데, 조선 시대 세습무 계통의 무부(巫夫)가 전통연희의 주요 담당층이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의 활동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는 무부를 포함해 북방 민족 계통의 수척(또는 백정(白丁))과 반인, 재승 계통의 승려ㆍ사장ㆍ사당ㆍ남사당과 다양한 유랑 예인집단 등이 전통연희를 담당했고, 이들 가운데 세습무계 연희자를 재인이나 광대라는 용어로 한정해 부르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신재효는 단가 「광대가(廣大歌)」를 통해 판소리 창자에게 요구되는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 등의 요건을 말하였는데, 여기서 ‘광대’는 명확하게 판소리 창자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판소리에서 기량이나 신분에 따라 창자를 구별하여 부르는 ‘또랑광대’ㆍ‘화초광대’ㆍ‘재담광대’ㆍ‘아니리광대’ㆍ‘비가비광대’ 등의 용어에서도 광대의 용례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용어에서의 ‘광대’는 해당 소리꾼의 자질을 다소 낮추어 보는 시선을 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창우 집단의 레퍼토리가 분화되면서 ‘소리광대’ㆍ‘줄광대’ㆍ‘고사광대’ㆍ‘어릿광대’ 등의 세분화된 용어가 나타났고, 이중 판소리가 독자적이고 대표적인 연희 종목으로 정립됨에 따라 판소리 창자를 ‘광대’로 총칭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역사적 변천 18세기 후반 유득공(柳得恭)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 중 유가(遊街)에 세악수(細樂手)ㆍ광대ㆍ재인을 대동한다는 데서 소리하는 광대와 악사인 재비, 줄타기나 땅재주를 하는 재인(才人)의 분업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송만재(宋晩載)가 지은 「관우희(觀優戱)」를 통해서는 영산회상(靈山會相), 가곡, 12가사, 어룡만연지희, 불토해내기, 포구락, 사자무, 처용무, 유자희(儒者戱), 요요기, 판소리 단가, 판소리, 땅재주, 검무, 줄타기, 솟대타기, 홍패고사 등 광대들의 구체적인 연희 종목을 볼 수 있다. 한편, 광대 집단 내부에서 이들 연희 종목에 대한 선호도는 소리, 장단, 곡예 순으로 나타났다. 호남 지역의 세습무계에 전해오는 “성대가 나빠서 ‘소릿광대’가 되기가 어려우면 기악을 배워서 ‘재비’가 되고, 그것도 재주가 없으면 줄타기를 배워서 ‘줄쟁이’가 되거나 땅재주를 배워서 ‘재주꾼’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굿판에서 잔심부름하는 ‘방석화랑이’가 된다”라는 말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경기 이남의 이들 세습무계 출신 창우 집단 외에 경기 이북의 재인촌, 광대촌 사람들을 광대 집단에 포함하기도 하는데, 이들의 주요 공연 종목은 〈배뱅이굿〉ㆍ〈장대장네굿〉ㆍ〈병신타령〉ㆍ〈개타령〉 등 서도 계통의 재담 소리이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광대들의 단체인 재인청(才人廳)이 전국 각지에 존재했다. 세습무계 출신의 무부(巫夫)가 중심이 되었던 이 단체는 신청(神廳)ㆍ악사청(樂師廳)ㆍ광대청(廣大廳)ㆍ화랑청(花郞廳) 등으로도 불렸다.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ㆍ「경기재인청선생안(京畿才人廳先生案)」ㆍ「완문등장팔도재인(完文等狀八道才人)」ㆍ「팔도재인등등장(八道才人等等狀)」 등의 문헌을 통해, 조선 시대에 재인청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중국 사신 영접과 같은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에 동원되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각 도마다 도청(都廳)이 있고, 그 우두머리를 대방(大房)이라고 했으며, 대방 밑에 도산주(都山主)를 두 사람 두었다. 한 도를 좌우로 나누어 좌도 도산주와 우도 도산주를 둔 것인데, 산주는 대방을 보좌하며 중요 사항을 의논했다. 계원은 세습무계 출신에 한정하였으며, 무악(巫樂)을 연주하는 화랑, 줄타기나 땅재주와 같은 곡예를 하면서 무악을 연주하는 재인, 가무 예능인이면서 무악을 연주하는 광대를 포함하였다. 실제 「완문등장팔도재인」(1824)과 「팔도재인등등장」(1827)에는 염계달ㆍ송흥록ㆍ고수관 등 판소리 명창들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하다. 재인청에 속한 광대들은 평소 자신의 거주지에 머물다가 나례(儺禮)나 중국 사신 영접 행사가 있으면 서울로 올라와 산대를 설치하고 연희를 거행했으며, 관아의 각종 행사나 사대부가의 회갑연ㆍ유가(遊街)ㆍ소분(掃墳)ㆍ문희연(聞喜宴) 등에도 참가했다. 인조, 영조 대에 이르러 나례와 사신 영접 행사에서 공식적인 산대희 거행을 중단한 후로는 민간에서의 연행 활동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남사당패ㆍ사당패ㆍ대광대패ㆍ솟대쟁이패ㆍ초라니패ㆍ풍각쟁이패ㆍ광대패ㆍ걸립패ㆍ중매구ㆍ굿중패 등 다양한 명칭의 유랑예인 집단이 활동했는데, 세습무계 출신의 광대 일부도 그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굿판을 떠나 더 이상 무업을 할 수 없게 된 처지의 광대들이 각종 유랑예인 집단에 편입되어 연희자로서의 활동을 지속한 것이다. 풍물(농악)ㆍ버나(대접돌리기)ㆍ살판(땅재주)ㆍ어름(줄타기)ㆍ덧보기(가면극)ㆍ덜미(꼭두각시놀음) 등이 유랑예인 집단의 주요 공연 종목이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과거 광대들이 연행해 온 가무백희의 전통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광대는 이후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국악의 계승과 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화성 재인청 출신의 이동안(李東安)은 박춘재(朴春載)에게 전수받은 기예로 국가무형유산 ‘발탈’의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역시 화성 재인청 출신으로 줄타기와 땅재주에 능했던 김관보가 전수한 줄타기는 국가무형유산 ‘줄타기’, 경기도 무형문화유산 ‘줄타기’ 종목 지정의 바탕이 되었다. 「팔도재인등등장」에 연명했던 송흥록을 비롯해, 박유전ㆍ장재백ㆍ유성준ㆍ장판개ㆍ김세종 등 재인청 출신 광대와 그 후예들이 불렀던 판소리도 국가무형유산 및 시도무형유산 ‘판소리’ 종목을 통해 폭넓게 계승되고 있다. 전통춤을 집대성하고 전수하여 ‘승무’, ‘태평무’ 등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판소리 고수로도 활약한 한성준(韓成俊, 1874~1941) 역시 재인청 출신이다.
광대는 악기 연주ㆍ판소리 같은 음악, 줄타기ㆍ땅재주ㆍ솟대타기 같은 곡예, 가면극ㆍ인형극 같은 민속극 등 폭넓은 레퍼토리를 보유하였던 특수 신분의 예인 집단으로, 이들의 레퍼토리는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발탈’, ‘줄타기’, ‘판소리’, ‘승무’, ‘태평무’, ‘봉산탈춤’,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통영오광대’, ‘남사당놀이’, ‘배뱅이굿’ 등 다수 종목의 전승과 보존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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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경(宋美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