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중반부터 한양 도성 밖 청파(靑坡) 일대에서 활약했던 경기잡가 소리꾼들
사계축은 미나리 재배 등으로 얻은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파움'이라는 움집에서 모여 노래를 배우고 창작하며 독자적인 좌창 문화를 형성했다. 사계축 소리꾼들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넘어, 기존 곡을 개작하거나 새로운 곡을 창작하며 경기잡가를 풍성하게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사계축은 생업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며, 한양의 좌창 문화를 선도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계축 (四契丑) 19세기 전·중반 무렵, 한양 도성 밖 청파동과 만리동 일대에서 활동했던 뛰어난 경기잡가 소리꾼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 명칭은 이들이 활동했던 '청파 1·2·3·4계'라는 지역 명칭에서 따온 '사계(四契)'와 '무리를 이루다'라는 의미의 순우리말 '축'이 결합된 것이다. 이들이 청파 지역을 기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비옥한 농지와 상업 활동으로 높은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근대 초에 활동한 경기잡가 소리꾼들이 자신들의 계보를 정립하며, 이 지역의 명창인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 등을 가장 높은 스승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청파 지역 출신이거나 이들에게 노래를 배운 모든 소리꾼들이 점차 사계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 용어는 경기잡가를 대표하는 소리꾼들의 통칭이 되었다.
○ 사계축 명칭
‘사계’는 청파 1계・2계・3계・4계를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청파 일대는 18세기에는 5계였다가 19세기 초에 4계로 재편되었다. ‘축’은 일정한 특성이나 수준에 따라 나누어진 사람들의 무리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사계축’은 청파 사계 지역에서 활동한 경기잡가 소리꾼들이란 뜻이고, 이 용어는 19세기 상황을 반영한다. 사계축의 활동 지역은 서울역 뒤편의 만리재 위를 크게 돌아 남쪽으로 내려온 청파 일대였다. 명칭은 그 중심이 청파 지역임을 말해준다. 이곳에서 태동한 노래에 ‘경기’라는 지역명이 붙은 것은 전통 시대에 왕경(王京)과 인근 외곽 지역을 포함하여 경기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즉 한양 성내와 인근 성 밖을 아울러 경기라 칭했고, 이 지역에서 발생한 노래라 하여 경기잡가라 했다.
○ 청파 사계의 지역적 특성
경기잡가가 청파 일대에서 태동한 것은 그 지역적 특성과 관련된다. 조선 후기 한양의 도시화 진행은 한양 오부(五部) 중에서도 단연 서부(西部)의 확장과 발달로 대표된다. 특히 서부 중에서도 성안이 아닌 '성 밖'의 발달이 매우 두드러졌다. 서부의 성 밖은 4개의 방(坊)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엄청난 인구 유입과 가파른 도시화 과정은 ‘용산방(龍山坊)’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청파는 용산방에 위치해 있었으며, 도성과 상당히 근접한 곳이었다.
청파는 한양 도성의 남대문에서 3리로, 곧 1.2km 거리인데, 도성에서 가까운 지역부터 차례로 청파 1・2・3・4계라는 지역명이 붙었다. 지역 이름 배치는 청파가 경강(京江) 연안보다는 도성과의 지리적 연관성을 중시하며 발달한 곳임을 말해준다. 청파 일대는 만초천의 범람으로 형성된 비옥한 토지에서 고수익성 채소 재배가 가능한 너른 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미나리 재배지로 유명한데, 그 수익은 벼의 5배나 될 정도였다. 지역 자체가 고수익 생산력을 갖췄다. 또한 도성에서 가까워 나라 창고가 곳곳에 산재해 있어 상업 유통지로 발달해 갔다. 이런 지역적 특성으로 연중 내내 땔나무, 숯, 볏짚 등 땔감의 집산지이자 매갈잇간이라 불렸던 정미소 밀집 지대였다. 이처럼 도성을 상대로 하는 유통기지에다가 남대문 안팎의 각종 시장들까지 일일생활권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청파였다. 청파는 한양이라는 도시를 상대로 하는 탄탄한 경제 구조를 갖춘 지역이었다. 이런 특징들은 도성 밖 지역들 중에서도 단연 높은 부를 갖게 했고, 이는 19세기 초 《동국여도(東國輿圖)》의 〈도성도(都城圖)〉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에는 성 밖 전체 중 유일하게 청파 일대만이 도성 안과 동일한 푸른색 기와집 밀집 지역으로 그려져 있다. 사계축의 경기잡가 문화는 이 같은 경제적 토대 위에서 발달할 수 있었다.
○ 사계축의 경기잡가 음악활동
경기잡가에는 넓게 보면 한성부 전역에서 활동한 전문 소리꾼이 불렀던 좌창(坐唱)과 입창(立唱)이 모두 포함된다. 그러나 오늘날 경기잡가는 선소리인 입창과 구분하여 앉은소리인 긴잡가와 휘모리잡가 등의 좌창만을 가리킨다.
긴잡가는 비교적 느리게 부르는 노래로 12잡가가 전해지고, 휘모리잡가는 해학적인 노랫말을 빠르게 엮어 부르는 노래로 10여 곡이 전해진다. 12잡가는 〈유산가(遊山歌)〉・〈적벽가(赤壁歌)〉・〈제비가[鷰子歌]〉・〈집장가(執杖歌)〉・〈소춘향가(小春香歌)〉・〈선유가(船遊歌)〉・〈형장가(刑杖歌)〉・〈평양가(平壤歌)〉・〈달거리[月令歌]〉・〈십장가(十杖歌)〉・〈방물가(房物歌)〉・〈출인가(出引歌)〉이다. 휘모리잡가에는 〈곰보타령〉・〈생매잡아〉・〈만학천봉〉・〈육칠월 흐린 날〉・〈한잔 부어라〉・〈병정타령〉・〈순검타령〉・〈기생타령〉・〈바위타령〉・〈비단타령〉・〈맹꽁이타령〉 등이 있다. 이 외에 〈풍등가豐登歌〉・〈금강산타령〉・〈토끼화상〉・〈갖은방물가〉・〈변강쇠타령〉・〈장기타령〉 등이 더 있다.
좌창은 앉아서 부른다 하여 ‘앉은소리’라고 하거나, 노래하는 이들의 근본이 샌님이라 하여 ‘새님소리’라고 했다. 입창은 서서 부른다 하여 ‘선소리’라고 하거나, 소릿값으로 엽전 두 냥씩을 거둬 주었기에 선소리패들을 얕잡아 ‘두냥머리’라고 불렀다. 이처럼 사계축의 좌창은 오강의 선소리에 비해 단정히 앉아 부르는 비교적 점잖은 소리로 인식되었다.
도성과 가까운 성 밖 일대는 도성 안처럼 오군영이 관할하는 자내(自內) 지역이었다. 그래서 당시 도성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자내 사람이라고 하였고, 도성으로부터 먼 경강인들을 오강 사람이라고 하여 격을 달리하던 풍조가 있었다. 청파는 어영청의 자내 구역이었다. 사계축은 자내 의식과 경제적 여유 속에서 오강 입창과 구별되는 품격으로 자신들만의 좌창 문화를 만들어갔다.
좌창에는 가곡・가사・시조 등 역사 깊은 장르가 있다. 사계축 경기좌창도 이들 장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계축의 대선배인 추교신은 가곡 남여창, 조기준은 가곡과 가사, 박춘경은 가사・시조와 잡가를 겸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좌창 문화는 1930년에도 경성 시조의 세 유파, 곧 기(妓)판[기생] 시조・위대[우대] 시조・사계(四契)집[사계축] 시조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사계축은 가곡・가사・시조에 조예가 있었고, 자신들의 고유한 유파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런 음악 문화 속에서 경기잡가가 태동했기에, 사계축 소릿꾼 중에는 가사, 시조에 정통해야만 잡가를 잘 부를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청파 일대의 좌창 문화는 자족적 가창 풍류 문화로 성행하다가 대략 근대 초부터 직업적 소리꾼들의 활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기잡가 소리꾼들은 도성의 우대, 아래대, 문안, 문밖에도 있었지만, 특히 잘하는 이들이 사계축이었다. 사계축의 활동 중심은 청파였지만, 경기잡가 계보에서 청파가 분명하게 밝혀진 이들은 거의 없다. 추・조・박 정도가 언급되지만, 확인되는 것은 청파 옆 애오개[오늘날 아현동]의 조기준뿐이다. 그럼에도 청파와 무관한 근대 초 대부분의 소리꾼들까지 사계축으로 불리는 것은 이들이 사계축으로부터 노래를 배웠기 때문이다. 소리꾼들은 두어 스승 밑에서 소리를 배우거나 심지어 나중에는 선소리도 배우는 등 다양한 경우를 보이는데, 대개 사승(師承)이 약하거나 확인되지 않는다. 사계축 초기 인물 중심으로 계보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추교신의 제자 조기준・장계춘(張桂春, 1848~1946), 조기준의 제자 박춘경・장계춘・최경식(崔景植, 1876~1949), 박춘경의 제자 박춘재(朴春載, 1881~1948)・최경식・주수봉(朱壽奉), 최경식의 제자 최정식(崔貞植, 1886~1951) 등이 있다. 최경식의 스승으로 조기준, 박춘경이 동시에 언급되는 것은 바로 사계축들이 두어 스승을 거치며 자신의 노래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사계축의 소리꾼들에게는 종종 있는 현상이었다.
초기 사계축 중 조기준은 애오개의 놋각장이, 박춘경은 밭쟁이였다. 이처럼 사계축은 생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소리꾼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대개 농부, 공장인(工匠人)들이었다. 노래 교수(敎授) 방식은 직접 찾아가서 배우기도 했지만, 모여서 부르고 배우기도 했다.전자의 사례로는 최경식이 직접 조기준의 일터를 찾아가 노래를 배웠던 일화가 전해진다. 그에 비해 후자의 사례는 청파 일대의 파움에서 집단적으로 이뤄졌다. 파움은 가을걷이 후 땅을 파 움집을 만들고, 그 안에서 도성민들에게 팔 파를 길렀던 곳이다. 파는 신선한 야채를 맛보기 힘든 겨울철 매우 요긴한 양념용 채소인데다가 겨울 파 기르는 데는 손이 많이 들지도 않기에 시간적 여유도 생기게 마련이다. 움집이라고는 하지만 그 안은 꽤 넓고 잘 꾸며놓아, 여러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 이 지역에 산재했던 파움은 풍류방으로 사용되어 소리꾼들과 귀명창들이 모여들었다. 이 움집을 깊은 사랑이라고도 하는데 꽤나 잘 갖춰져 있어서, 소리꾼들의 공연장, 수련장, 전수장이었다. 여름에는 공청(公廳)이라 하여 원두막처럼 지어서 지붕을 덮고, 마루를 놓아 멍석이나 자리를 깔고 한해 여름을 났다고 한다. 이런 움집이나 공청은 도성 밖 곳곳에 있었는데, 특히 청파 일대의 파움이 소리방으로 유명했다. 이런 파움 형태 풍류방의 성행이 집단적인 사계축 소리의 형성, 발달, 확산에 적잖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계축 좌창의 이러한 자족적인 풍류문화 전통은 훗날 전문 소리꾼 최경식이 사설교습소를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면서도 보수를 받지 않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사계축 소리꾼들은 단순히 소리만 했던 것이 아니고 주도적으로 곡에 손질을 가하며 경기잡가를 발전시켜 갔다. 박춘경은 오래된 꽤 긴 〈유산가〉 원곡의 앞머리를 잘라내어 현행 곡을 만들었다. 흔히 농부인 박춘경의 문학적 식견에서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파 지역의 고수익성 채소 재배가 가져온 높은 경제적 부, 밭농사에서 형성된 소리방 움집의 산재 등은 사계축 농부에 의한 곡 손질이 자연스러웠을 당시 잡가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최정식은 〈금강산타령〉・〈풍등가(豐登歌)〉를 작사・작곡 했고, 〈갖은방물가〉를 지었으며, 서도잡가 〈제전(祭奠)〉을 축소・개편 했다. 사계축의 후예들은 다수의 휘몰이잡가도 창작했다. 특히 이현익(李鉉翼)이 유명한데, 그는 〈병정타령〉・〈맹꽁이타령〉・〈바위타령〉・〈순검타령〉 등 다수의 휘몰이잡가를 지었다. 근대 초 잡가집에는 노래 제목에 ‘신제’・‘별조’・‘별’등을 붙여 지속적으로 새로운 곡을 만들어간 정황이 확인된다. 이처럼 사계축 소리꾼들과 그 후예들은 단지 가창만 했던 것이 아니라, 때로는 능동적으로 개작하고 창작하며 경기잡가를 풍성하게 가꾸어갔다.
사계축은 평민 집단에서 좌창 문화를 자생적으로 즐기고 발달시켜 온 소리꾼 집단이다. 이런 자족적 풍류 문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청파 지역이 축적한 경제적 부 덕분이었다. 이들은 도성 안과는 다른 시조 유파를 형성하는 한편 경기잡가라는 장르를 새로이 만들며 자신들의 가창 문화를 열어갔다. 이들의 가창 활동은 다른 지역의 잡가들과 만나면서 근대 대중가요인 잡가의 시대를 맞이하게 했다.
『동국여도(東國輿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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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愼慶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