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계축의 경기잡가 음악활동
경기잡가에는 넓게 보면 한성부 전역에서 활동한 전문 소리꾼이 불렀던 좌창(坐唱)과 입창(立唱)이 모두 포함된다. 그러나 오늘날 경기잡가는 선소리인 입창과 구분하여 앉은소리인 긴잡가와 휘모리잡가 등의 좌창만을 가리킨다.
긴잡가는 비교적 느리게 부르는 노래로 12잡가가 전해지고, 휘모리잡가는 해학적인 노랫말을 빠르게 엮어 부르는 노래로 10여 곡이 전해진다. 12잡가는 〈유산가(遊山歌)〉・〈적벽가(赤壁歌)〉・〈제비가[鷰子歌]〉・〈집장가(執杖歌)〉・〈소춘향가(小春香歌)〉・〈선유가(船遊歌)〉・〈형장가(刑杖歌)〉・〈평양가(平壤歌)〉・〈달거리[月令歌]〉・〈십장가(十杖歌)〉・〈방물가(房物歌)〉・〈출인가(出引歌)〉이다. 휘모리잡가에는 〈곰보타령〉・〈생매잡아〉・〈만학천봉〉・〈육칠월 흐린 날〉・〈한잔 부어라〉・〈병정타령〉・〈순검타령〉・〈기생타령〉・〈바위타령〉・〈비단타령〉・〈맹꽁이타령〉 등이 있다. 이 외에 〈풍등가豐登歌〉・〈금강산타령〉・〈토끼화상〉・〈갖은방물가〉・〈변강쇠타령〉・〈장기타령〉 등이 더 있다.
좌창은 앉아서 부른다 하여 ‘앉은소리’라고 하거나, 노래하는 이들의 근본이 샌님이라 하여 ‘새님소리’라고 했다. 입창은 서서 부른다 하여 ‘선소리’라고 하거나, 소릿값으로 엽전 두 냥씩을 거둬 주었기에 선소리패들을 얕잡아 ‘두냥머리’라고 불렀다. 이처럼 사계축의 좌창은 오강의 선소리에 비해 단정히 앉아 부르는 비교적 점잖은 소리로 인식되었다.
도성과 가까운 성 밖 일대는 도성 안처럼 오군영이 관할하는 자내(自內) 지역이었다. 그래서 당시 도성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자내 사람이라고 하였고, 도성으로부터 먼 경강인들을 오강 사람이라고 하여 격을 달리하던 풍조가 있었다. 청파는 어영청의 자내 구역이었다. 사계축은 자내 의식과 경제적 여유 속에서 오강 입창과 구별되는 품격으로 자신들만의 좌창 문화를 만들어갔다.
좌창에는 가곡・가사・시조 등 역사 깊은 장르가 있다. 사계축 경기좌창도 이들 장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계축의 대선배인 추교신은 가곡 남여창, 조기준은 가곡과 가사, 박춘경은 가사・시조와 잡가를 겸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좌창 문화는 1930년에도 경성 시조의 세 유파, 곧 기(妓)판[기생] 시조・위대[우대] 시조・사계(四契)집[사계축] 시조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사계축은 가곡・가사・시조에 조예가 있었고, 자신들의 고유한 유파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런 음악 문화 속에서 경기잡가가 태동했기에, 사계축 소릿꾼 중에는 가사, 시조에 정통해야만 잡가를 잘 부를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청파 일대의 좌창 문화는 자족적 가창 풍류 문화로 성행하다가 대략 근대 초부터 직업적 소리꾼들의 활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기잡가 소리꾼들은 도성의 우대, 아래대, 문안, 문밖에도 있었지만, 특히 잘하는 이들이 사계축이었다. 사계축의 활동 중심은 청파였지만, 경기잡가 계보에서 청파가 분명하게 밝혀진 이들은 거의 없다. 추・조・박 정도가 언급되지만, 확인되는 것은 청파 옆 애오개[오늘날 아현동]의 조기준뿐이다. 그럼에도 청파와 무관한 근대 초 대부분의 소리꾼들까지 사계축으로 불리는 것은 이들이 사계축으로부터 노래를 배웠기 때문이다. 소리꾼들은 두어 스승 밑에서 소리를 배우거나 심지어 나중에는 선소리도 배우는 등 다양한 경우를 보이는데, 대개 사승(師承)이 약하거나 확인되지 않는다. 사계축 초기 인물 중심으로 계보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추교신의 제자 조기준・장계춘(張桂春, 1848~1946), 조기준의 제자 박춘경・장계춘・최경식(崔景植, 1876~1949), 박춘경의 제자 박춘재(朴春載, 1881~1948)・최경식・주수봉(朱壽奉), 최경식의 제자 최정식(崔貞植, 1886~1951) 등이 있다. 최경식의 스승으로 조기준, 박춘경이 동시에 언급되는 것은 바로 사계축들이 두어 스승을 거치며 자신의 노래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사계축의 소리꾼들에게는 종종 있는 현상이었다.
초기 사계축 중 조기준은 애오개의 놋각장이, 박춘경은 밭쟁이였다. 이처럼 사계축은 생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소리꾼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대개 농부, 공장인(工匠人)들이었다. 노래 교수(敎授) 방식은 직접 찾아가서 배우기도 했지만, 모여서 부르고 배우기도 했다.전자의 사례로는 최경식이 직접 조기준의 일터를 찾아가 노래를 배웠던 일화가 전해진다. 그에 비해 후자의 사례는 청파 일대의 파움에서 집단적으로 이뤄졌다. 파움은 가을걷이 후 땅을 파 움집을 만들고, 그 안에서 도성민들에게 팔 파를 길렀던 곳이다. 파는 신선한 야채를 맛보기 힘든 겨울철 매우 요긴한 양념용 채소인데다가 겨울 파 기르는 데는 손이 많이 들지도 않기에 시간적 여유도 생기게 마련이다. 움집이라고는 하지만 그 안은 꽤 넓고 잘 꾸며놓아, 여러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 이 지역에 산재했던 파움은 풍류방으로 사용되어 소리꾼들과 귀명창들이 모여들었다. 이 움집을 깊은 사랑이라고도 하는데 꽤나 잘 갖춰져 있어서, 소리꾼들의 공연장, 수련장, 전수장이었다. 여름에는 공청(公廳)이라 하여 원두막처럼 지어서 지붕을 덮고, 마루를 놓아 멍석이나 자리를 깔고 한해 여름을 났다고 한다. 이런 움집이나 공청은 도성 밖 곳곳에 있었는데, 특히 청파 일대의 파움이 소리방으로 유명했다. 이런 파움 형태 풍류방의 성행이 집단적인 사계축 소리의 형성, 발달, 확산에 적잖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계축 좌창의 이러한 자족적인 풍류문화 전통은 훗날 전문 소리꾼 최경식이 사설교습소를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면서도 보수를 받지 않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사계축 소리꾼들은 단순히 소리만 했던 것이 아니고 주도적으로 곡에 손질을 가하며 경기잡가를 발전시켜 갔다. 박춘경은 오래된 꽤 긴 〈유산가〉 원곡의 앞머리를 잘라내어 현행 곡을 만들었다. 흔히 농부인 박춘경의 문학적 식견에서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파 지역의 고수익성 채소 재배가 가져온 높은 경제적 부, 밭농사에서 형성된 소리방 움집의 산재 등은 사계축 농부에 의한 곡 손질이 자연스러웠을 당시 잡가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최정식은 〈금강산타령〉・〈풍등가(豐登歌)〉를 작사・작곡 했고, 〈갖은방물가〉를 지었으며, 서도잡가 〈제전(祭奠)〉을 축소・개편 했다. 사계축의 후예들은 다수의 휘몰이잡가도 창작했다. 특히 이현익(李鉉翼)이 유명한데, 그는 〈병정타령〉・〈맹꽁이타령〉・〈바위타령〉・〈순검타령〉 등 다수의 휘몰이잡가를 지었다. 근대 초 잡가집에는 노래 제목에 ‘신제’・‘별조’・‘별’등을 붙여 지속적으로 새로운 곡을 만들어간 정황이 확인된다. 이처럼 사계축 소리꾼들과 그 후예들은 단지 가창만 했던 것이 아니라, 때로는 능동적으로 개작하고 창작하며 경기잡가를 풍성하게 가꾸어갔다.
신경숙(愼慶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