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봄날의 풍경과 꽃들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창작된 당악정재.
최화무는 조선 후기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 무자년(1828) 진작연(進爵宴)에서 무동정재(舞童呈才)로 처음 연행되었다.
최화무는 봄날의 궁궐 속 아름다운 꽃들이 피기를 재촉하고, 아름다운 봄 풍경을 찬미하는 내용의 춤이다. 이 춤은 두 가지 형태가 전해진다.
○ 향악정재 최화무의 내용과 구성 향악정재 형식의 최화무는 무용수 여섯 명이 추는 구성이 비교적 간단한 춤이다. 『무자 진작의궤』 정재악장의 “무동 6인이 줄지어 서서 북향하여 춤춘다.(舞童六人 列立北向而舞)”에서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주요 대형은 ①일렬로 춤추기 ②동서 2열로 춤추기 ③돌기(회선이무) ④ 남북 2열 만들어 서로 교차하며 춤추기 ⑤일렬(초입배열도)로 춤추며 돌아가면 춤이 마무리된다. 춤추는 중간에 무용수 6인이 1첩부터 4첩 창사를 병창한다. ○ 당악정재 최화무의 내용과 구성 당악정재 형식의 최화무는 죽간자와 무용수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중무용의 전형적인 대형 변화를 보이고 있다. 대체적으로 ①죽간자가 진구호 부르기 ②처음 대형(초입배열도)에서 ③사방(四方) 만들어 춤추기 ④일렬 만들어 춤추기 ⑤오방(五方) 만들어 춤추기 ⑥일렬 만들어 춤추기 ⑦회선(回旋)하기 ⑧처음 대형으로 돌아가 춤추기 ⑨죽간자 퇴구호 순으로 진행된다. 죽간자 구호 외에도 오언 또는 칠언으로 된 한문시 창사를 중무(中舞)와 협무(挾舞)가 여러 차례 부르는 것도 특징적인 부분이다.
○ 창사 최화무는 향악정재와 당악정재 두 가지 형식이 존재하므로 창사도 각기 다르게 불렸다. - 향악정재 최화무의 창사 향악정재 형식의 최화무 창사는 순조 무자년(1828) 『진작의궤』에 전하며, 모두 네 첩(疊)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제3첩과 제4첩 가사는 당나라 장호(張祜, 약 785~849?)의 〈춘앵전〉 시(詩)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1첩) 梨園弟子簇池頭(이원제자족지두): 이원의 제자들 연못가에 빽빽이 모여 小樂携來候燕遊(소악휴래후연유): 악기를 들고 제비 나타나길 기다리네. (2첩) 試挾銀箏先按拍(시협은쟁선안박): 은쟁을 시험삼아 끼고 몇 곡조 타보는데 海棠花下合梁州(해당화하합량주): 해당화 아래에선 「양주」곡이 어울린다네 (3첩) 興慶池南柳未開(흥경지남류미개): 흥경지의 남쪽 버들가지 싹트지 않았는데, 太眞先把一枝梅(태진선파일지매): 양귀비는 벌써 매화꽃 한 가지를 꺾어 들었네. (4첩) 內人已唱春鶯囀(내인이창춘앵전): 궁녀들은 이미 춘앵전을 노래하고 花下傞傞軟舞來(화하사사연무래): 꽃 아래 사뿐사뿐 춤추러 나오누나. -번역문 출처: 이의강 책임번역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 당악정재 최화무의 창사 당악정재 최화무의 창사는 효명세자가 지은 것〔예제〕으로, 죽간자가 춤을 시작할 때 하는 진구호(進口號)에서 “갈고(羯鼓)로 새로운 곡조를 연주하여, 궁궐 정원의 꽃들이 피기를 재촉하나이다.”라고 아뢰고, 춤이 끝날 때에는 “아정한 음악 이제 끝났으니 절하여 하직하고 물러나렵니다”라는 퇴구호(退口號)를 부른다. 이외에 중무 치어(中舞致語) 및 협무 창사(挾舞唱詞)를 부르는데, 협무 창사 중에 〈금도초전사(金刀初剪詞)〉는 〈육화대(六花隊)〉의 삼념시(三念詩)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죽간자의 퇴구호도 〈육화대〉 퇴구호의 일부를 개사(改詞)하여 지은 것이다. 최화무와 〈육화대〉의 창사는 화사한 봄날과 피어나는 아름다운 봄꽃을 묘사한 내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죽간자 구호] 宮鶯嬌聲 弄上都之春(궁앵교성 농상도지춘) 猲鼔新腔 崔宸苑之花(갈고신강 최신원지화) 敢進香階 幸預呈才(감진향계 행예정재) [죽간자 구호 번역문] 궁궐의 꾀꼬리 교태로운 울음으로 도성의 봄을 희롱하나이다. 갈고(羯鼓)로 새로운 곡조를 연주하여 궁궐 정원의 꽃들이 피기를 재촉하나이다. 감히 향기로운 섬돌에 나아가 다행히 재주를 올리게 되었나이다. [중무 치어] 竹枝調美 弄玉簫而轉聲(죽지조미 농옥소이전성) 桃葉情多 疊花拍而催腔(도엽정다 첩화박이최강) 且奏梨園之雅樂 宜遊瓊林之曲宴(차주이원지아악 의유경림지곡연) 來歌來舞 以娛君王(내가내무 이오군왕) [중무 치어 번역문] 죽지(竹枝) 노래는 절조가 아름다워 옥퉁소를 불매 소리가 옥구르는 듯 하나이다. 도엽가(桃葉歌)[왕헌지(王獻之)가 첩 도엽을 위해 지은 노래]에 애정이 담뿍하니 화박(花拍, 악곡의 정박 외에 덧붙이는 절박)을 거듭쳐서 곡조를 재촉하나이다. 이제 이원(梨園)의 우아한 음악을 연주하니 경림(瓊林, 송나라 궁안의 정원으로 仙境 같은 아름다운 곳)의 곡연(曲宴)에 노니는 듯 하옵니다. 노래와 춤을 올려 군왕을 즐겁게 해드리겠나이다. [협무 창사1] 春光且莫去(춘광차막거) 留與醉人看(유여취인간) [협무 창사1 번역문] 봄빛아 잠시 떠나지 말아서 취한 사람에게 실컷 보도록 해다오. [협무 창사2] 淸曉牧丹芳 乍點錦江春(청효목단방 사점금강춘) 紅艶疑金蕊 永認笙歌地(홍염의금예 영인생가지) [협무 창사2 번역문] 맑은 날 아침 모란이 활짝 피어 어느새 금강(錦江)의 봄을 차지하였네. 어여쁜 붉은 색에 황금 꽃술 엉기니 길이 연주하고 노래하기 좋은 곳이라 여겨지네. [협무 창사3] 感人心爲物瑞 戴上玉釵時(감인심위물서 대상옥차시) 爛慢烟花裏 逈與凡花異(난만연화리 형여범화이) [협무 창사3 번역문] 자태가 상서로워 사람 마음 흔드누나. 옥비녀를 머리에 꽂고 흐드러지게 핀 봄 꽃 속에서 평범한 꽃과 완전히 다르다오. [협무 창사4] 金刀初剪露痕新 輕疊羅黃密綴均(금도초전노흔신 경첩나황밀철균) 碧玉枝頭開遍到 裊嬈偏稱上都春(벽옥지두개편도 요요편칭상도춘) [협무 창사4 번역문] 금도(金刀)로 꽃가지 처음 자르니 이슬 흔적이 새로운데 청초한 첩라황〔국화의 한 품종〕 빼곡이 이어져 조화를 이루네. 벽옥같은 가지 끝에 두루두루 피었으니 아름다운 모습 도성의 봄에 꼭 어울리누나. [죽간자 구호] 嬌紅嫩綠 競娟硏於麗景(교홍눈록 경연연어려경) 淸歌妙舞 獻媚姿於華筵(청가묘무 헌미자어화연) 雅樂旣成 拜辭以退(아악기성 배사이퇴) [죽간자 구호 번역문] 새빨간 꽃과 연두빛 잎사귀들 아름다운 봄 경치 속에서 고운 모습 저마다 뽐내는데 청아한 노래와 아름다운 춤으로 화려한 연회에서 아리따운 자태를 바쳤나이다. 아정한 음악 이제 끝났으니 절하여 하직하고 물러나렵니다. [중무 치어] 幸在盛世 庸瞻華筵(행재성세 용첨화연) 席上之歌壇曲終 凝行雲而徘徊(석상지가단곡종 응행운이배회) 花間之簫鼓聲催 知回雪之將飄(화간지소고성최 지회설지장표) 未敢自專 伏候宸旨(미감자전 복후신지) [중무 치어 번역문] 다행히 태평한 시절에 살아 화려한 잔치를 보았나이다. 자리 위의 음악소리 그치고 가던 구름도 멈추고 배회했나이다. 꽃 사이로 퉁소소리 북소리 채촉하면 눈송이 나부끼듯 빨리 떨어져야 함을 아나이다. 감히 마음대로 못하여 성상의 분부를 기다리옵니다. -번역문 출처:송방송,조경아,이재옥,송상혁, 『국역 순조기축진찬의궤』,권3 부편, 민속원, 2007. ○ 반주 음악 - 향악정재 최화무의 반주음악 죽간자가 없는 무동(舞童) 여섯 명이 추는 향악정재 최화무에는 〈향당교주〉 한 곡만을 연주하였다. - 당악정재 최화무의 반주음악 당악정재 최화무에서는 〈보허자령〉 및 〈향당교주〉 두 곡만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하였다. 최화무와 함께 조선 후기에 창제된 당악정재 〈장생보연지무〉ㆍ〈연백복지무〉ㆍ〈제수창〉 네 종목에도 모두 동일하게 이 두 곡만 연주되었다. ○ 복식ㆍ의물ㆍ무구 최화무를 춘 무동의 복식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1828년(무자)에는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홍라포(紅羅袍)와 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 남질흑선상(藍質黑縇裳)을 입고 주전대(珠鈿帶)를 매고 흑화(黑靴)를 신었다. 이는 〈춘광호〉ㆍ〈첩승무〉의 무동 복식과 동일하다. 1829년(기축)에는 죽간자와 무용수의 인원이 변하면서 복식도 다소 변화를 보인다. 각건(角巾)을 쓰고 홍포(紅袍)에 백질흑선중단의를 입고 남야대(藍也帶)를 매고 흑화(黑靴)를 신었는데 이는 〈장생보연지무〉와 동일하다. 여령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록이 없으므로 대체로 조선후기 여령의 기본 복식을 착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화관(花冠)을 쓰고, 안에는 남색 치마〔裏藍色裳〕에 겉은 홍색 치마〔表紅綃裳〕에, 황초단삼(黃綃單衫)을 입고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매고 초록혜(草綠鞋)를 신었으며, 1901년(신축)에는 황초단삼 대신 녹초단삼(綠綃單衫)을 착용한 점이 다를 뿐이다. 현대에 이르러 1980~1990년대 재현 당시의 여령 복식은 조선조와 달리 화관을 쓰고 용비녀, 쪽을 하고 방위색을 나타내는 청ㆍ홍ㆍ황ㆍ흑ㆍ백의 오방색 몽두리를 착용하였으며, 죽간자는 초록 몽두리를 착용한 점이 다르게 나타난다. 주로 당악정재에 사용되는 죽간자는 붉은 칠을 한 대나무로 만든 의물(儀物)로서, 무용수 두 사람이 죽간자를 들고 처음과 끝에 춤의 내용을 알리는 창사를 부르며 선두에서 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 역사적 변천 최화무는 1828년(순조 28, 戊子)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40세 생신을 경축하는 진작연에서 초연되었다. 『진작의궤』(戊子, 1828) 소재 정재악장의 최화무조에 “『도서집성(圖書集成)』에 ‘송·태종이 직접 소석조(小石調)를 지었는데 아홉 번째가 최화발(摧花發)’이다.(圖書集成 宋太宗親製小石調九摧花發)”라는 세주가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최화무가 송나라의 소석조와 관련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초연 당시에는 무동(舞童) 6명만이 추는 향악정재 형식의 춤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29년(순조 29, 己丑)에는 순조의 40세 생신과 즉위 30년을 경축하기 위한 진찬연(進饌宴)에서는 효명세자가 창사를 새로 짓고, 죽간자(竹竿子) 두 명이 추가되고 무용수 다섯 명으로 구성된 당악정재 형식으로 바뀌어 전승되었다. 즉 최화무는 형식과 대형, 인원수 등에서 완전히 다른 향악정재와 당악정재 형태의 두 작품이 존재한다. 최화무가 연행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조선 말 고종 대까지 궁중 연향에서 추어지다가 일제강점기에 단절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1981년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의 재현 안무로 당악정재 최화무가 무대에 올려진 이후 전승되고 있으며, 2020년에는 향악정재 최화무도 재현되는 등, 오늘날까지 국립국악원 무용단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최화무는 조선후기 순조대에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했던 3년 동안(1827~1830)에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로 창작되어진 작품이다. 1828년에 모친 순원왕후의 40세 생신 축하연에서는 향악정재를, 1829년에는 부친 순조의 40세 생신과 즉위30년 경축연에서 직접 창사를 지은 당악정재를 올려 경하하였다. 최화무는 전혀 다른 향악·당악정재의 두 형식을 가진 독특한 작품이므로,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닌 춤인 데 비해 형식ㆍ출연 인원ㆍ 대형ㆍ 창사ㆍ복식 등에서 다양성을 보이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창사에서도 향악·당악정재 최화무에서는 한문시(漢文詩)로 된 창사를 부르는데 반해 창사가 없는 향악정재 최화무도 장서각 소장 『정재무도홀기』(2-2883)에 전해진다. 최화무는 〈장생보연지무〉ㆍ〈연백복지무〉ㆍ〈제수창〉과 함께 조선 순조 때에 창작된 당악정재의 하나로써 역사적 의미가 있다.
최화무가 조선 시대에 연행된 기록은 『진작의궤』(戊子, 1828)와 『진찬의궤』(己丑, 1829)ㆍ『진찬의궤』(壬辰, 1892)ㆍ『진찬의궤』(辛丑, 1901)에 나타나며, 춤의 순서가 기록된 홀기(笏記)로는 『정재무도홀기』((癸巳)와 『진연홀기』(甲午, 1894) 외에 장서각 소장의 연대 미상의 『무동각정재무도홀기(舞童各呈才舞圖笏記)』 등이 전해지는 정도이다.
『(무자) 진작의궤』 『(기축) 진찬의궤』 『(임진) 진찬의궤』 『(신축) 진찬의궤』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4집: 시용무보, 정재무도홀기』,국립국악원, 1980. 정신문화연구원,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이의강 책임번역,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송방송, 조경아, 이재옥, 송상혁, 『국역 순조기축진찬의궤』, 권3 부편, 민속원, 2007.
심숙경(沈淑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