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악학궤범』의 '시용전정헌가(時用殿庭軒架)'에서는 노래 부르는 이와 훈(塤)·지(篪)·생(笙)· 우(竽)·화(和) 등의 아악기, 태평소(太平簫) 등의 당악기, 중금(中笒)과 소금(小笒) 등의 향악기가 빠지고, 아쟁(牙箏)과 대쟁(大箏) 등의 당악기 및 대금(大笒) 등의 향악기 인원이 늘어났다. 즉, 아악기의 수가 줄고 향ㆍ당악기 수가 증가하였으므로 이에 대해 이혜구(李惠求)는 '아악의 요소는 줄어들고, 향당교주(鄕唐交奏)의 색채가 농후하게 변화한 것'이라 하였다.
편성 인원은 『국조오례의』의 69명에서 『악학궤범』 '시용전정헌가'에 이르러 열명 정도 감소하고, 이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및 『춘관통고(春官通考)』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인조 21년에는 40인으로 축소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전정고취가 쓰이던 의례에도 전정헌가가 사용되면서 그 역할이 확대되었는데, 정조(正祖) 때에는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등의 향악기가 제외되면서 관악 편성 형태로 변모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혜구는 '향당교주보다 당악의 색채가 더 농후해진 것'으로 판단하였다.
임영선(林映宣)